오이스가 전력 33회차 <장난>




   그러니까 시작은, 전혀 진지하지 않았다. 여느 때와 같은 장난이었다. 대학의 권태에 찌들어버린 오이카와는 2학년이 되던 해,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싶다는 말을 거의 숨 쉬듯 내뱉었고 맞은편에 앉아 슈크림을 털어 넣던 하나마키는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로 그러면 가라는 말을 심드렁하게 내뱉었다. 마츠카와와 이와이즈미는 애초부터 오이카와의 말에 반응조차 하지 않았다.

   “너 미국 가고 싶다며. 고등학교 때부터 그랬었잖아. 가. 저번 해에 아르바이트 하면서 모아둔 거 좀 있지않아?”

   “글쎄. 돈은 대충 있는데 막상 가자니......”

   “쫄았구나.”

   “겁쟁이네.”

   “입으로만 불평불만.”

   “저러는 거 하루이틀이냐.”

   이와이즈미의 마지막 말에 오이카와는 일종의 반발심 같은 것을 느꼈다. 그래도 나 한다면 하는 사람이라고. 일년이 넘도록 오이카와의 생활엔 아무것도 특별할 것이 없었고 그는 이런 나른함에 완전히 절어버린 참이었다. 새로운 게 필요해, 재밌던가, 아니면 이상하더라도 좋아. 오이카와의 머릿속에서 몇달간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 것들이었다. 너 영어도 못하잖아. 바디랭귀지 몰라, 이와쨩? 야, 진짜 갈거면 나 면세점에서 담배 좀. 난 미국 과자. 친구들의 시답잖은 말에 오이카와는 앙칼진 체를 하면서 국물도 없다는 말을 했다. 사실 그 자체로서도 정말로 미국에 갈 생각은 없었다. 한 일주일간 고민하다가 결국 잊혀질 사안이었다. 오이카와는 생각보다도 훨씬 더 예민했다. 사진이나 텔레비전 속에서나 봐왔던 타국은 그에게 유혹적일지언정 진지한 고려의 대상이 되진 못했다. 그랬었다.

   아주 건전하게 카페에서 시작된 모임이 밥집을 건너 술집으로 흘러갔고, 장난처럼 시작된 게임에서 오이카와가 독박을 썼고, 주량을 훨씬 넘긴 탓에 제정신이 아닌 체로 미국행 비행기표를 끊었고, 다음 날 오후에서야 그 사실을 알아챈 이 일련의 사건들 중 하나라도 제 구실을 하지 못했더라면 오이카와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고 먹다 남은 찌개를 데우고 매번 똑같은 버라이어티쇼를 보다가 그렇게 다시 잠드는 일상을 반복했을 것이다. 문제는 이 모든 일들이 지나칠 정도로 제 몫을 완벽하게 해냈다는 것이었다.

   오후 세시 경, 메세지 기록을 확인하던 오이카와는 십만엔 가까이가 출금된 카드사의 문자를 보았고 급히 기록을 확인했다. 아메리칸 에어라인. 이후에 온 문자를 보았다. 일주일 후 토요일 오후 8시 20분 출발. 한참을 입을 벌리고 문자를 쳐다보던 오이카와는 항공사로 전화를 걸어 티켓 취소에 대해 문의했다. 상냥한 목소리의 상담사는 전혀 상냥하지 않은 내용을 죽 설명했다. 위약금이 보통 돈이 아니었다. 표의 절반가격 쯤 되는 금액에 오이카와는 감사하다는 영혼 없는 말을 끝으로 종료 버튼을 눌렀다. 상황이 막상 닥쳐오자 오이카와는 신기할 정도로 낙관적이어졌다. 어떻게든 되겠지. 영어 몰라도 뭐, 그 느낌이라는 게 있잖아. 필. 그래. 여행이라는 건 확실히 사람 마음을 들뜨게 하는 부분이 있었다. 어제의 알콜전사들이 속한 단체 채팅방에 미국행 티켓을 끊었다는 말을 던져두고 오이카와는 텔레비전을 켰다. 사실 별 생각이 없었다. 학교에서 갑작스러운 휴학계를 받아주려나. 그정도였다. 이후의 일에는 많은 생각을 할애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렇게 사막 한가운데에 남겨지는 것은 오이카와로서는 정말 완벽하게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나가야 할지 감조차 잡히지 않는다고 오이카와는 생각했다. 분명히 차에서 잠깐 눈을 붙일 때까지는 이틀 전 바에서 만난 친구와 함께 고속도로를 질주하고 있었건만 엄청난 고통을 느끼고 눈을 뜬 후에는 이미 차는 저만치 멀어진 뒤였다. 인적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서부의 고속도로에 완벽하게 버려졌다. 불과 10초도 안되어 일어난 일이었다. 부랴부랴 확인해 본 지갑 안에 카드와 현금은 없었다. 비상금을 넣어둔 카드를 신발 밑창에 깔아놓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여기선 그 돈조차 쓸 수 없었다.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던, 더 정확는 널부러져 있던 오이카와는 아직도 얼얼한 엉덩이를 문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림자가 짧았다. 뒷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휴대폰을 꺼냈지만 아스팔트에 부딪혀 액정이 고장난 것인지 정확한 시간은 알 수 없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때문에 햇빛이 강하게 느껴져 인상을 찌푸렸다. 그 찌푸림에는 배신자에 대한 혐오와 배고픔에 의한 짜증 또한 섞여있었다. 끝도 없이 이어진 도로를 바라보며 오이카와는 이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 나갈지를 생각해 보았다. 물론 떠오르는 것은 없었고 사실 있다 하더라도 그리 좋은 생각이 아닐 것임은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서있는 지도 30분을 훌쩍 넘긴 것 같건만 지나가는 차는 단 한 대도 없었다.

   “일단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움직여봐야 하려나.”

   가까운 곳에 작은 동네라던가 하다못해 휴게소라도 있을 확률은 제로에 가까워보였지만 가만히 서 있는 것 보다는 뭐라도 행동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고 오이카와는 생각했다. 미아가 되면 가만히 그 자리에 있으라지만 오이카와에겐 그를 데려올 보호자가 없었다. 아. 이와쨩 보고 싶다. 맛층이랑 맛키도. 오이카와는 터덜터덜 걸으면서 속으로 생각나는 노래를 불렀다. 걸어도 걸어도 똑같은 풍경에 질려버리지 않으려면 무엇이라도 해야했다. 흥얼대던 우울한 노래가 네번 쯤 바뀌었을 때 도로의 저 멀리서 점 같은 것이 나타났다. 좀 더 가까워졌을 때 오이카와는 그것이 연한 보라색으로 칠해진 캠핑카인 것을 알아챘다. 오이카와는 다른 생각을 할 여력도 없이 곧장 왼팔을 들고 엄지손가락을 올렸다. 이런 흉흉해보이는 도로에서 히치하이커를 태워줄만 한 자애로운 사람이 과연 남아있을까 하는 비관적인 생각이 떠올랐지만 혹시 지나친다면 달려가서 붙잡기라도 할 생각이었다. 연보라색 캠핑카는 다행스럽게도 오이카와의 앞에 멈춰섰다. 조수석의 창문이 천천히 열리더니 허여멀건한 얼굴의 동양인이 보였다. 운전석에 앉은 남자는 정면을 바라본 채로 담배를 피고 있었다. 묘한 색의 머리를 한 그는 이쪽으로 느릿하게 얼굴을 내밀더니 그 행동만큼이나 여유로운 어투로 말을 걸어왔다.

   “당신. 지금 도움이 필요한거죠?”

   오랜만에 듣는 일본어에 눈물이 날 뻔한 것을 둘째치고 오이카와는 그 남자가 자신에게 말을 한 것이 의외라고 생각했다. 창문을 열었다면 말을 걸어오는게 당연한 것임에도. 아니 의외였다기 보다는 말을 했다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고 하는 것이 맞았다. 얼떨떨한 느낌 때문에 오이카와는 입을 뗄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탈 거예요?”

   두번째로 말을 걸어온 덕에 오이카와는 이번엔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할 수 있었다. 남자는 슬쩍 웃더니 조수석의 문을 열어주었다.

   “어서 와요.”

   오이카와는 그 말이 차에 타는 것을 허락해주는 종류의 것보다는 귀환을 환영하는 상황에 더 어울릴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는 꼭 그렇게 말했다. 마치 자신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며 오이카와는 차에 발을 올렸다. 그는 달빛처럼 웃었다. 인간 홀리는 장난을 즐겨하는 요정처럼. 자신이 하기엔 너무 감성적인 생각이었다는 걸 오이카와는 아주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한낮의 만남은 그렇게도 비현실적인 데가 있었다.






-

제목은 그게(?) 맞습니다... 원제가 The Hitchhiker's Guide To The Galaxy니까 이 글은 The Hitchhiker's Guide To The West 정도 될까요. 이 시리즈의 제목들을 참 좋아해요. 능력만 되면 주제들로 해서 다 써보고 싶은데...


-

진짜 무진장 늦었지만 장난이란 주제로 이게 딱 생각나버려서 철판깔고 지금 올려봐요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