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줌이 채 안될 것 같은 꽃다발을 카운터 위로 던지듯 내려놓으며 스가와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만 마음이 계속 모질지는 못해서 스가와라는 슬쩍 눈치를 보다가 꽃을 만지작대곤 사이에 꽂힌 카드를 빼들어 내려놓았다. 눈물을 흘리는 모양의 이모티콘이 그렇게 가증스럽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미안하긴 뭐가 미안해. 오히려 즐기는 거면 몰라도. 깊게 내쉬어진 숨에 얇은 카드가 팔랑이며 뒤집혔다. 뒷면에도 글씨가 있는 것에 스가와라는 종이를 집어 들었다.
「오년 전 스가와라 씨 덕분에 좋아하게 된 꽃이예요. 팬지의 꽃말을 알고 있나요?」
꽃말 같은 걸 아는 사람으로 보고 있다면 한참 잘못 본 건데. 스가와라는 핸드폰을 들어 팬지의 꽃말을 검색했다. 나를 생각해주세요. 나를 생각해주세요? 성공하셨네. 몰래 꽃만 놓고 가는데 생각이 안 날래야 안 날 수가 있나. 스가와라는 카드를 노려보다가 오년 전이라는 단어에 눈을 두었다. 오년 전. 팬지. 작은 꽃다발로 시선을 돌린 스가와라는 이내 작게 손뼉을 쳤다. 어디서 많이 본 꽃 같더라니 카페를 처음 개업했을 때 가게 앞에 작게 만들었던 화단에 심었던 꽃이었다. 그 해 여름에 무지막지한 태풍이 불어 흔적도 없이 날아가긴 했지만. 무언가 단서가 잡혔다는 생각에 스가와라는 계산대 밑에서 종이를 꺼내 그제까지 왔던 손님들의 이름을 적어내려갔다. 길게 쓰인 리스트에서 개업 때부터 그 해 여름까지 가게에 온 적이 있던 손님을 추려내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어제 온 손님들의 이름을 체크할 때 스가와라는 더욱 집중했다. 오이카와는 아니었다.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으니까. 우시지마 교수는 삼년 전 쯤 처음으로 가게에 왔고 카게야마는 신입생이니 제외. 마지막으로 남은 이름들에 스가와라는 빨간 펜으로 밑줄을 그었다. 이 중에 있어도 문제, 없어도 문제였다. 스가와라는 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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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 열리는 소리에 스가와라는 얼굴의 수심을 지워내고 친절한 사장님의 것을 덮어썼다. 오늘의 첫 손님은 사와무라였다. 카게야마는 시험 기간이라 자주 들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다음번에 온다면 카라멜 시럽 잔뜩 넣은 마끼아또를 만들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주문받은 커피를 만들며 스가와라는 넌지시 사와무라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다이치.
“정착한다는 건 어떤 느낌이지? 그러니까 사랑받는다는 거 말이야.”
스가와라의 말에 사와무라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사랑이란 단어는 언제나 스가와라와는 가까운 듯 멀었다. 적어도 제 생각엔 그랬다. 고등학생 때부터 꽤 화려한 연애들을 했던 스가와라는 거의 대부분 마지막에 우는 역할이었다. 저 좋다고 하는 좋은 놈들이 많음에도 스가와라는 흔히들 말하는 나쁜 남자에게 끌려했고 그 나쁜 남자가 망할 새끼가 되고나서야 관계는 파탄을 맞는 것이었다. 스가와라는 거의 항상, 아니 매번 울었고 그 옆에서 티슈를 뽑아주는 게 자신의 몫이었던 사와무라였다. 친구의 진지한 물음에 사와무라는 고심하며 턱을 몇 번인가 쓸었다.
“좋지.”
“그게 다야?”
“그냥 그게 제일 가까운 말일 것 같아. 좋아.”
사랑받고 있다는 거, 그러니까 내가 누군가에게 단순한 호감 이상의 감정을 느끼게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만드니까. 그 기분이 좋아. 쌍방이라면 더 좋겠지.
“난 그래서 너도 좋았으면 좋겠어, 스가.”
“무리야.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누구인지는 차차 알아가면 되는 거겠지. 오늘도 꽃 놓고 간 거지? 누군지는 몰라도 너한테 알아달라고 난리를 치고 있잖아.”
사와무라의 말에 스가와라는 카드를 들어 그의 눈앞에 내밀었다.
“이거 봐. 5년 전이래. 자그마치 5년. 카페 개업했을 때야. 그런데 왜 이제서야 이런 일을 하냔 말이야.”
“그건 나도 모르지. 거창한 이유 같은 거 아닐 수도 있어. 행동하게 되는 데에 항상 크고 엄청나게 그럴듯한 이유만 필요한 건 아니잖아.”
“예를 들어?”
“뭐. 네가 너무 좋아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던가.”
“됐네요. 이젠 그런 로맨틱한 거 안 먹혀. 너무 많이 데었다고.”
아픈 데를 맞은 얼굴을 하는 것에 사와무라는 꽤 식은 커피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위로를 하자니 출근 시간이 다가오기도하고 사와무라는 사실 제 친구를 조금 강하게 키워보자고 마음먹은 참이기도 했다. 일은 적당히 하고 농땡이는 많이 피우라고 말하면서 손을 흔드는 제 친구는 그렇게 사회생활을 하고 나이를 먹으면서도 천진한 면이 있었다. 운명적인 로맨스를 꿈꾸는 이에게 꽃을 가져다 바치는 건 꽤 먹혀들만 한 작전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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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 닫히는 소리에 스가와라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다이치는 이 일을 재미있는 하나의 해프닝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만 스가와라는 영 그렇질 못했다. 적어도 그에겐 좋아한다던가, 사랑한다는 단어는 무게가 꽤 나가는 것이었다. 게다가 오늘 그 기한까지 알게 되어버렸으니. 5년. 그러니까 일로 치면 아마도.... 스가와라는 생각하는 것을 관두고 다시 깊게 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누군지는 알아야 마음이 편할 것 같다고 스가와라는 생각했다. 누구인지, 딱 그 정도만. 그런데 알고 나면?
“아. 머리야.”
“머리가 아파요?”
훅 치고 들어온 목소리에 스가와라는 순간 어깨를 움츠리며 굳어버렸다. 뻣뻣하게 굳은 채로 고개를 돌려 보니 걱정스러운 표정을 한 아카아시가 서 있었다.
“세상에. 오셨으면 기척이라도 좀 내셔야죠.”
“죄송해요. 그 표정이 별로 안 좋으시길래 요란하게 들어오기도 좀 그래서. 무슨 일 있어요?”
“별 일 아니예요. 늘 드시던 거죠? 참, 오늘은 그 꽃다발 없어요. 테이블 쓰실 수 있는데.”
“그간엔 마감 때문에 바빴던 거라 여기까지 가져온 거였어요. 어제 넘겨서 쓸 필요가 없긴한데... 스가와라 씨 말동무가 필요한 거라면 앉고요.”
“기념으로 드릴만한 게 없는데 어떡하죠. 어제까지 팔다 남은 케이크가 있는데 괜찮을까요?”
뭐든 감사하게 먹겠다는 아카아시의 말에 스가와라는 언제나와 같은 메뉴를 만들고 깨끗이 씻어 널어놓은 그릇에 케이크 한 조각을 담았다. 열어놓은 창문으로 아침공기가 들어 스가와라는 전과는 달리 기분좋게 숨을 들이쉬었다.
“저, 스가와라 씨.”
“네?”
“영화 좋아하세요?”
“영화요? 좋아하긴 하죠. 시간이 없어서 본 지는 꽤 됐지만... 왜요?”
“시사회 티켓이 생겨서요. 별 일 없으시면 같이 가는 건 어떨까 하고. 너무 부담스럽게 생각하진 마시구요.”
스가와라는 고개를 돌려 의자에 앉아 이쪽을 보고 있는 아카아시와 눈을 맞췄다. 턱을 괸 채로 앉아있던 아카아시는 스가와라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조금 틀며 웃는 것으로 답했다.
“무슨 시사회예요?”
“이번에 각본에 참여한 영화가 있는데 제작사 측에서 몇 개 주더라고요.”
“원래 소설 쓰시던 거 아니었어요? 영화 각본 얘기는 처음 듣는 거 같은데.”
“소설만 쓰고 밥 벌어먹기 힘드니까요. 가끔 다른 일도 받아 하고... 그런 거죠.”
“말씀은 감사한데... 제가 그런 데 가도 되는 건지 모르겠네요. 전 뭐 아카아시 씨처럼 관계자도 아니고.”
“제가 감사해서 그래요. 항상 멋진 커피에 서비스까지 해주시니까. 답례 같은 거라고 생각해주세요.”
“날짜는요?”
“다다음 주 토요일이요. 괜찮으세요?”
“조금 생각해보고 말씀드려도 될까요? 아직 일정이 어떻게 될지를 잘 모르겠어서요.”
“물론이죠. 정해지면 편하게 말씀하세요.”
아카아시에게 휘핑크림을 담뿍 담은 프라푸치노와 베리를 올린 타르트를 트레이에 담아 건넨 스가와라는 카운터에 고개를 빼고 앉아 천천히 입을 떼었다. 아카아시는 시원하게 프라푸치노를 빨아올리곤 타르트에 집중했지만 그런 스가와라의 말에 답하는 것을 소홀히 하진 않았다.
“저도 한 때는 문학가를 꿈꿨었죠. 재능의 한계 때문에 그만두긴 했지만... 당장 대학에 가야하는데 잘 쓰지도 못하는 글만 끄적이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그때 저한텐 문학보단 대학에 낼 에세이가 더 중요했으니까요.”
“다들 그렇죠. 저도 처음 이쪽에 발 들였을 땐 눈앞이 깜깜했었으니까.”
“내 생각에 아카아시 씨는 배우나 아이돌 같은 걸 했어도 성공했을 거 같아요. 그런 일 없었어요? 막 쟈니스에 주변사람이 사진 보내고 그런 거.”
“절 곤란하게 하시네요.”
난처한 표정을 한 아카아시를 보는 것을 즐거운 일이었으나 그 웃음이 썩 오래가진 못했다. 스가와라는 작게 한숨을 내쉬곤 말을 이었다.
“그렇게 아등바등 살았는데 결국 지금은 이 손바닥만 한 카페 주인이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그 때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 걸 그랬어요.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저 꽤 재능 있었는데. 저 에세이로는 떨어진 대학이 하나도 없었어요.”
“스가와라 씨는 어느 학교 다녔다고 하셨죠?”
“저 그냥 지방에 있는 대학 나왔어요.”
“어느 지역?”
“교토에 있는 국립대라고 말하면 아시려나?”
“스가와라 씨, 공부 진짜 잘하셨나보네요.”
“과거의 영광이죠. 지금은 뭐.”
스가와라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아카아시는 시계를 확인하곤 내일 또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가게를 나섰다. 테이블에 흘린 것도 없이 의자를 제자리에 넣고 나가는 아카아시를 보며 스가와라는 그가 참 예의바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영화 시사회라. 평소 같았다면 말이 나오자마자 가겠다며 덥석 물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조금 달랐다. 그래. 물론 좋은 사람이지. 좋은 사람이지만...... 손님들을 자꾸 그런 쪽으로만 생각하게 되어 큰일이라고 스가와라는 생각했다. 하루 빨리 범인을 잡아내야겠다고 생각하던 와중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안녕. 스가와라 씨.”
“안녕하세요. 괜히 오랜만에 보는 것 같고 그러네요.”
“어제 하루 안 온 건데요. 뭐. 듣자하니 어제 대단했다던데.”
“어떻게 알았어요?”
“친구가 말해줬죠. 어제 왔다 갔잖아요.”
아아. 그 같은 회사의... 스가와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미치겠어요. 누군지 알 수가 있어야죠.”
“CCTV는요?”
“외부엔 없어요. 거긴 뭐 훔쳐갈 만 한 게 없으니까 안 달았거든요...”
“뭐. 짚이는 사람은?”
“마츠카와 씨. 단언컨대 근 일 년 간 저한테 연애감정 같은 걸 내비친 사람은 정말 단 한 사람도 없었어요. 그런데 이거 보라구요.”
스가와라는 카드 뒷면의 메세지를 그에게 보여줬다. 마츠카와는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와 고개를 숙여 카드의 메세지를 눈에 담았다.
“5년 전이래요. 그러니까 제 말은 너무 오래됐다는 거예요. 왜 5년씩이나! 아무 말도 않고! 조용히 있다가! 왜 하필 지금! 자기를 드러내지 못해 안달이냐 이거죠.”
“5년 간 참았는데 이제 스가와라 씨를 너무 좋아하게 되어서 못 견디게 됐나보죠.”
“꼭 누구랑 비슷한 말을 하시네요.”
“그래요?”
“네. 있어요. 제 친구인데... 비슷한 말을 오늘 아침에 하고 갔어서.”
늘 하시던 거로? 스가와라의 질문에 마츠카와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여섯 잔. 전부 아이스로요. 네네. 전부 아이스로.
“확실히 날이 따듯해지긴 했죠. 아이스가 많이 나가요. 하루 종일 기계를 켜놔야 할 정도니까.”
“오후 쯤 되면 더우니까요. 이제.”
“그렇죠. 봄인데 어디 놀러가고 그런 계획은 없으신가.”
“아는 사람들끼리 왜 이래요. 샐러리맨이 쉴 시간이 어디 있다고.”
“너무 슬프잖아요. 그거.”
“현실인걸요.”
종이 트레이에 담은 커피를 먼저 건네고 더 큰 사이즈의 커피를 내밀며 스가와라는 비밀이라도 말하듯 마츠카와에게 속삭였다. 오늘은 특별히 투샷 추가예요. 손님. 마찬가지로 작은 목소리로 고맙다고 말하는 것에 둘 다 웃음이 터져버렸다. 일 열심히 하라는 말로 배웅하며 스가와라는 손을 흔들었다. 밀린 설거지를 하고 미지근한 물에 우린 차를 반쯤 마셨을 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스가와라는 들고 있던 컵을 옆으로 밀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어서요세요. 그... 오이카와 씨.”
“안녕하세요. 이름 기억하고 계시네요.”
“저 기억력이 꽤 좋아서요. 진짜 오늘도 오셨네요.”
“스가와라 씨 말을 믿어보려고요. 이 근처에 이만한 카페가 없다면서요.”
“저 거짓말은 못하는 성격이라. 오늘은 어떤 거로 하실래요?”
“다 맛있다고 하셨으니까... 스가와라 씨가 좋아하는 거로 주시겠어요?”
“단 거 좋아하세요?”
없어서 못 먹죠. 능청스런 답에 스가와라는 일단 바닐라 시럽을 컵에 부었다. 달고 시원한 건 정신건강에 좋은 법이니까. 냉장고에서 꺼낸 우유를 탈탈 털어 넣으며 스가와라는 커피액과 우유가 섞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홀더를 끼운 잔을 내밀자 오이카와는 그 자리에서 바로 라떼를 마셨다. 티비에서나 보던 커피광고 같은 모습에 스가와라는 오 하는 감탄사를 밖으로 낼 뻔했다.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는 것에 스가와라 또한 마찬가지로 엄지를 들어 올렸다.
“이사 온지 얼마 안 됐다고 하셨죠. 지낼 만 해요?”
“그런 거 같아요. 이렇게 좋은 카페도 알게 되고.”
“과찬이시네. 저기 골목 끝에 있는 식당 가보셨어요? 진짜 괜찮아요. 메뉴도 많고 사장님도 친절하시고. 밤늦게까지 열어서 혼자 한 잔 하기에도 괜찮구요.”
“스가와라 씨 추천이라면 믿을 만 하네요. 시간 날 때 같이 갈래요?”
“같이요?”
“네. 같이.”
“음. 이거 혹시 데이트 신청이신가?”
“들켰나요?”
스가와라는 눈가를 조금 찌푸린 채로 눈앞에 선 오이카와를 바라보다가 카운터 안쪽에 비스듬히 세워놓은 꽃다발로 눈을 옮겼다.
“장미꽃도 오이카와 씨가 가져다 놓은 거예요?”
“아뇨. 그건 아닌데...”
오이카와는 말꼬리를 느리게 끌고는 카운터 쪽으로 상체를 숙여 말을 이었다.
“꽃다발 덕에 행동을 빨리하게 된 건 있죠. 스가와라 씨는 인기가 많은 것 같으니까.”
“제가요?”
“그게 증거잖아요.”
턱짓으로 작은 꽃다발을 가리키며 오이카와가 말했다. 스가와라는 어떤 말을 해야할지 감도 잡히지 않아 눈을 굴리다가 천천히 입을 떼었다. 정확히는 떼려고 했었다.
“안녕. 스가와라 씨. 오늘도 뭐 대단한 게 있나?”
쿠로오의 등장으로 말할 타이밍을 놓쳐버렸지만. 매일 보던 얼굴이지만 평소처럼 반길 수가 없어서 스가와라는 손을 몇 번 흔들고 어색하게 웃어버렸다. 그런 스가와라의 웃음을 쿠로오와 오이카와가 눈에 담았음은 물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