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夜


 

  그렇지만 그 모든 것 가운데 진실이 얼마나 될까?

  

  베케트, 고도를 기다리며

 

 

 

 

 

  형언이란 얼마나 무의미한가. 미야 아츠무는 퍽 감상적인 생각을 했다. 언어는 항상 상황에 비해 조악할 수밖에 없었고 그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의 한계는 너무나도 뚜렷했다. 그럼에도 언어를 저버리지 못하는 것은 무엇이든 속박하고 싶어하는 인간의 본성에 있을 것이라고 그는 이어 생각했다. 간직하지 못해 안달이 난 것이 인간이고 붙잡아두지 못해 우는 것이 본성이었으며 미야 아츠무는 자신이 그 범주에 든 한낱 인간이라는 것을 굳이 부정하진 않았다. 명명하는 순간, 형언하는 때에 휘발되어 사라져버리는 것들은 사실 가장 중요한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예 사라져버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나아서 사람들은 계속해서 단어를 나열하고 이미지를 남기는 것인지도 몰랐다.

  감상의 원인은 전적으로 그에게 있었다. 다만 미야 아츠무는 그를 위한 문장을 쓸 재주도, 카메라 렌즈를 들이밀 기술도 없었기에 지켜보는 것으로 대강 만족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고작 삼일만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는 그로서도 알 길이 없었다. 그가 인지하고 있는 것이라곤 스가와라 코우시는 눈을 잡아챌만 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런 그에게 계속해서 눈길을 두고 있는 자신 뿐이었다. 스가와라 코우시는 형언하기가 어려운 사람이었다. 언어가 어디까지 그에게 미칠지도 문제였다. 알고 있는 형용사가 많지 않았고 또 그를 정의할 수 있는 하나의 단어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의문이었다. 희지만 빛나지 않고 고요하지만 확연하며 단정하지만 묶여지지 않는 상태를 정의할 말을 미야 아츠무는 알지 못했다. 저 조악한 형용사의 나열 중 얼만큼이 그에게 해당하는 것인지도 확실치 않았다. 언제나 이미지는 진실했지만 또 거짓투성이였으므로.

  언어는 시인의 손에 들어가면 꽃이 된다던데 미야 아츠무는 시인도 원예사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표현하는 대신 묘사하기로 했다. 눈에 들어온 모습을 한치의 꾸밈 없이 아주 직관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그의 최선이었다. 우선 그는 얇은 커튼을 통과해 들어온 오전의 햇빛이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빛에 반사되는 게 아니라 흡수한다는 느낌. 그래서 빛나지 않는지도 몰랐다. 교수의 강의에 집중한 듯 고개를 끄덕임에 따라 얇고 힘이 세지 않은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옆자리에 앉았다면 샴푸 냄새를 맡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왼쪽 뒷자리는 그를 바라보기엔 최적의 장소였다. 눈 아래 찍힌 점을 배제하고 그를 논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를 이루는 것들이 만들어질 때, 육체가 만들어지고 곧은 손가락 위에 손톱이 내려앉고 머리카락이 자라난 후 그 마침표로 찍어진 것일지도 모른다는 허무맹랑한 생각을 했다. 그정도로 그건 확연했고 맺어졌다는 느낌을 주었다. 긴 문장 끝의 점. 그다지 매초롬하지는 않지만 끝이 잘빠진 눈의 마침. 그 점은 그랬다.

  고개를 돌리려는 낌새가 보여 펴놓은 노트 위로 시선을 옮겼다. 눈이 마주친다면 언제나처럼 친절한 낯짝을 하고 우연인 체하며 웃으면 되는 일이었지만 그 얼굴을 할 수 있을 지가 작은 의문이었다. 확실치 못한 일은 하지 않는 게 나았고 그래서 고개를 숙였다. 스가와라 코우시가 정말 고개를 돌렸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펜으로 교수의 말을 받아 적는 체를 하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스가와라 코우시의 시선은 다시 교수와 프로젝터로 띄운 PPT로 향해있었다. 그 올곧은 시선의 끝에 늙은 교수와 고루한 글자가 있다는 것은 낭비로 느껴졌다. 교수는 소포클레스에 대한 이야기로만 강의를 채우려는 것 같았다. 미야 아츠무는 턱을 괸 채로 펜을 굴렸다. 구름에 가렸던 해가 드러남과 거의 동시에 교수가 슬라이드를 바꾸었다. 피라미드 모양의 도형이 나오자 사각대는 소리가 크게 늘었다. 스가와라 코우시도 고개를 숙이고 필기에 전념했다. 뒷목의 머리칼이 끝나는 지점에서부터 볼록하게 솟은 뼈를 핥듯이 쳐다보았다. 결국 극이라는 건 상승과 하강의 조화입니다. 교수가 말했다. 상승과 하강이 만나는 곳을 우리는 정점이라고 칭하는데 이 정점이 어디가 될 지는 모릅니다. 극의 초반부일 수도, 정석적으로 중반일 수도 아예 끝에서야 나타날 수도 있어요. 스가와라 코우시는 고개를 들어 교수를 주시했고 미야 아츠무는 그런 스가와라 코우시를 주시했다. 이내 그는 깨끗한 노트 위로 선을 그었다. 끝없이 위를 향해가면 좋으련만 노트는 너무 작아서 선은 끊기거나 꺾일 수밖에 없었다. 모든 슬라이드가 넘어갔고 검은 화면이 나타나자 교수는 마이크를 떼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스가와라 코우시는 가방으로 필통과 노트를 집어넣으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강의실 끝에 선 교수에게 닿을 수 없는 크기의 목소리였다. 뱉는다기 보다는 입안에서 맴도는 것을 내었다는 느낌. 스가와라 코우시 답다고 그는 생각했지만 누군가가 스가와라 코우시 다운 것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잘 대답할 자신은 없었다. 그는 크지 않게 말했고 배우가 되고 싶어 했었으며 오전의 햇빛을 목덜미에 얹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그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그정도 뿐이었다

  느린 손으로 가방을 메며 뒷문을 나서는 등을 보았다. 노트 위로 그었던 선과는 달리 스가와라 코우시의 어깨는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다음 수업까지도 그 등에 대한 생각은 사그라들지 않아서 미야 아츠무는 전공 교수의 질문에도, 몸이 좋지 않냐는 동기의 물음에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저녁을 먹을 거냐는 물음에 고개를 젓고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눕고 나서도 그에 대한 잡념은 맺어지지 않고 오히려 더 증식해 천장과 책장의 빈 틈새와 창문 밖 검은 하늘을 가득 채웠다. 별 하나 보이지 않는 밤은 스가와라 코우시와 잘 어울릴지도 모르겠다고 미야 아츠무는 생각했다. 밤의 그에겐 달이 움직이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릴지도 모르겠다고. 한참을 뒤척이던 그는 눈을 감고 햇빛이 묻어있던 스가와라 코우시의 목덜미를 떠올렸다. 곧게 아래로 뻗었다가 밑으로 흘러내리던 선을 더듬으며 그는 아주 오랜만에 수음했다. 욕망으로 점철된 손으로 어떤 일을 할지, 할 수 있을지 그는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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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二夜



  너는 저녁놀과 새벽빛을 눈에 머금고

  폭풍우를 예고하는 밤처럼 향기를 발산한다


  보들레르, 아름다움에 바치는 찬가 中






  흰 것을 기분 나쁘게 여기는 성정대로라면 미야 아츠무는 스가와라 코우시를 불쾌하게 여겨야하는 것이 맞았다. 객관적인 흰 것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눈으로 보이는 것이 그닥 중요치 않다는 것을 미야 아츠무는 아주 오래 전에 깨달았으므로. 애초에 미야 아츠무는 그 보이는 흰 것을 표방하는 사람이었다. 친절함과 웃음은 그의 장기였다. 사람들은 자주 친절과 다정을 혼동했고 미야 아츠무는 기꺼이 그들에게 친절하고도 다정한 사람이 되어주었다. 작정하고 만들어진 흰색은 역겨울지언정 그 속이 훤했다. 아주 견고한 그 한 꺼풀만 벗겨내면 속에 시커먼 것들이 있었다. 반면에 스가와라 코우시는 너무 희어서 깊이를 가늠하기가 힘든 류의 사람이었다. 다만 은연중에도 절대 얕지 않을 것을 직감해서 미야 아츠무는 스가와라 코우시를 싫어해야 맞았다. 이제까지대로라면 그래야만 했다. 그러니까 문제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흰 스가와라 코우시에게 미야 아츠무는 혐오라던가, 마이너스 쪽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지 않았다. 놀라울만큼 그런 감정이 피어오르지 않아서 그 자신이 더 당황할 정도였다. 연극을 좋아하고, 배우가 꿈이라고 말하던 그 밍밍한 스가와라 코우시는 반듯했지만 어느 틀에도 어울리지 않았고, 그래, 희지만 빛나지가 않았다.

  유난이라는 생각은 그에게도 있었다. 그냥 같은 수업 듣는 타과생인데 왜. 그냥, 그냥 아주 우연히 같은 조가 된 것 뿐이고 수업이 끝나면 원래 그랬던 것처럼 완전히 멀어질 관계인데 굳이. 그러니까 자신이 이렇게까지 구는 이유는 전적으로 스가와라 코우시에게 있다고, 미야 아츠무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주 오랜 버릇이 있었다. 사람을 보면 들여다보고 재단해 ‘이런’ 사람이라고 판단하는 버릇. 그리고 대부분의 ‘이런’ 사람이 ‘그런’ 사람이었으므로 미야 아츠무는 자신의 직감과 오랜 시간 사람들을 관찰하며 갈고 닦아온 그 분석력을 신용했다. 그런데, 스가와라 코우시에겐 그게 먹혀들지가 않았다. 미야 아츠무는 스가와라 코우시가 자신의 눈이 미치는 범위의 저 너머에 얌전하게 앉아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손을 뻗어 잡을 정도로 절실한 것은 아니었기에 그는 내내 이 묘한 이질감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쯤 되면 스가와라 코우시가 불쾌할만도 하련만 정말로 의외로 불쾌, 그러니까 유쾌하지 않은 감정은 그에게서 일어나지 않았다. 애초에 유쾌란 또 무엇이며……, 길게 생각해봤자 답이 없을 것을 알아서 미야 아츠무는 그냥 스가와라 코우시를 조금 다른 부류로 넣어두기로 했다. 이런 인간도 있겠구나. 드물어서 처음인 것이겠구나 하고. 다만 그것은 오랫동안 유지해온 체제를 무너뜨리지 않기 위한 일종의 방어기제일 뿐이었으므로 큰 효가가 나타나지 않았고 또 앞으로도 그럴 것임을 미야 아츠무는 잘 알고 있었다.


  늦어도 내일까지라는 말대로 스가와라 코우시는 해가 질 즈음에 문자를 보내왔다. 학교에서 버스로 30분, 미야 아츠무의 집에서 전철로 10분 정도가 걸리는 거리에 있는 극장의 이름이 보였다. 연극은 셰익스피어의 십이야十二夜. 열두 개의 밤. 바로 다음으로 시작 시간을 보낸 스가와라 코우시는 이번엔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미야 아츠무는 스가와라 코우시가 셰익스피어의 이 연극을 좋아하는지, 그가 배우가 된다면 이 극의 일원이 되고 싶어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나흘 후, 스가와라 코우시와 미야 아츠무는 도쿄의 작은 극장으로 셰익스피어의 십이야를 보러 가야한다. 연극은 교수가 정한 것이고 셰익스피어는 스가와라 코우시가 정한 것이다. 미야 아츠무는 휴대전화 옆 버튼을 눌러 메세지가 보이지 않도록 했다. 그는 뒤를 돌아 천천히 입을 떼었다.


   “사무. 나흘 뒤에 좀 늦게 들어올지도 몰라.”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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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一夜



  나는 진정 사는가 싶게 살아 있는 것을

  불꽃 속에서 죽기를 갈망하는 것을 찬미한다.


  괴테, 거룩한 갈망 中






  사실 미야 아츠무의 3학년 1학기 시간표에서 월․수 9시 30분의 희곡의 이해는 그닥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전공도 아닌 2학점짜리 강의는 정말 학점에 구멍이 나지 않게 하려는 의도에서 넣은 것이었고 열심히 임할 생각도, 그렇다고 아예 버릴 생각도 없는 그런 밋밋하고 별 의미 없는 수 많은 강의 중 하나였던 것이다. 프레젠테이션으로 채워진 첫 수업에서조차 미야 아츠무는 제일 구석 뒤편에 앉아 늙은 교수의 말을 흘려듣고 있었다. 2학점 교양 주제에 조별 과제에 발표가 있는 것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10분 여 정도의 짧은 것이라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했다. 창 밖엔 봄이 한창이었다. 교정을 가득히 채운 사람들의 표정도 벚나무도 모두 봄이었다. 햇빛이 따듯해서 미야 아츠무는 괜히 기분이 나빠졌다. 기분이, 나쁘다. 나쁘다라. 사소한 단어에 매달리는 것은 그의 특기가 아니었지만 아주 잠깐의 취미가 되긴 했다. 그는 봄과 나쁘다라는 말의 상관관계에 몰입했다. 세간의 인식으로 치면 전혀 관련이 없는 단어였다. 봄은 따듯하고 부드러웠으며 나쁘다는 차갑고 날이 서있었다. 미야 아츠무는 자신이 후자에 더 가까운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태생이 그랬다. 아주 어릴 적의 버릇을 그는 고치지 못했고 사실 고칠 마음도 없었다. 기어가는 곤충을 보면 다리를 떼고 싶었고 돌 틈새로 핀 꽃은 밟아줘야했다. 어린 아이의 순진무구한 잔학함이 ‘어린’이라는 단어에 포함되지 않을 때까지 이어진다면 그건 본성인 거라고,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이유에서 미야 아츠무는 성악성을 신봉했다. 인간은 본디 악하다. 사람을 죽이고 난도질해 뉴스와 신문에 나오는 것만이 악이 아니었다. 흰 것이 있으면 어떤 색으로라도 물들이고 싶어하는 욕망, 그는 그것을 악이라도 규정했다. 또 그러한 연유로 그는 악을 사랑했다. 희기만 한 것은 어쩐지 기분이 나쁜 이유에서였다.

   2인으로 짜여진 조는 교수의 임의였다. 미야 아츠무, 스가와라 코우시. 호명된 이름의 주인은 강의실의 가장 중앙에 앉아 있었다. 불려진 이름에 들린 팔이 하얬다. 다만 형광등 아래서도 반짝인다는 느낌은 없었다. 분을 바른 대리석 같다고 생각했다. 잘 갈아진 대리석 위에 장미가루를 섞은 분을 바른 것 같은 색이라고. 미미한 혈색이 돌았다. 손목 위로 어렴풋이 드러난 핏줄은 파랄 것이다. 보지 않았지만 짐작하건대 그랬다. 어렸을 적 어머니의 치맛바람에 몇년인가를 다녔던 미술학원은 종종 이런식으로 그의 감상을 도왔다. 미야 아츠무는 감상과 먼 사람이니 결국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는 말이었다. 교수는 별 시답잖은 이야기를 몇 번 하더니 조원과 회의를 하라고 했다. 중앙의 회색 머리에게 다가간 미야 아츠무는 손가락을 굽혀 작게 책상을 쳤다. 꾸며낸 미소를 얼굴이 띄우는 것은 아주 오랜 습관이었다. 그는 친절해보이는 얼굴을 잘 알았다. 집에 있는 똑같은 얼굴과 다르게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거울보다도 정확했고 그래서 쉬웠다. 똑, 똑. 문에 노크를 하는 듯한 동작에 스가와라 코우시가 고개를 들었다. 조원이요. 아, 네.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기에 작게 고개를 까닥여 답했다. 책상을 붙여 앉고 전화번호를 교환하고서도 이렇다 할 말은 나오지 않았다. 대부분의 다른 조가 그랬고 몇 명만이 꽤 소리를 내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연극 좋아하세요?”


  스가와라 코우시의 첫마디는 그거였다. 연극 좋아하세요? 미야 아츠무는 고개를 저었다. 연극은 좋아한다거나 싫어한다는 범주에 끼지 못했다. 아무 생각이 없다는 게 맞았다. 연극은 그에게 생각을 할애할만 한 대상이 아니었다. 그의 부정에도 스가와라 코우시는 실망한다거나 아쉽다는 기색이 없었다. 어색한 사이를 타개할만 한 질문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마치 예상하기라도 했다는 듯 그는 말을 이었다.


  “저는 좋아해요. 연극.”


  아. 그러세요. 네. 그래요. 그러시구나. 영양가 없는 말이 뒤를 따랐다. 미야 아츠무는 어떤 연극을 좋아하냐던가, 왜 연극을 좋아하냐는 질문도 던지지 않았다. 궁금하지 않았을 뿐더러 흥미없는 이야기를 예의상 이어가는 것은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그는 친절함은 가장할 수 있을지언정 다정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원하는 것을 쉽게 내어주지 않는 성정이었지만 그로서도 스가와라가 그런 질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스가와라는 좀, 아니 많이 희어서 읽기가 어려웠다. 저. 스가와라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배우가 되고 싶었거든요.”


  그러셨구나. 미야 아츠무는 대답을 먼저 내어놓고 이어 생각했다. 배우라. 화려함이 느껴지는 단어는 스가와라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니 배우라는 직업도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스스로 빛을 내고 반짝여 눈을 사로잡는 사람들이라던데 스가와라는 무대에서든 스크린에서든 타인의 눈을 잡아챌만 한 사람은 아니라고. 과거형으로 뱉어진 말이니 그도 그 꿈을 접은 것일지 모른다. 미야 아츠무는 다시 한번 웃었다. 소리는 내지 않고 얼굴로만. 모두가 친절하다고 여기는 그 얼굴이었다.


  “발표는 언제 하도록 할까요?”

   

  배우이니 뭐니 하는 소리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말을 의미만 남겨두고 단어를 재조립해 건넸다. 스가와라는 최대한 빨리 하자고 말했다. 동감이었다. 근처의 극장에서 하는 극이 있어요. 그걸 보고. 네. 발표 시간도 짧으니까요. 최대한 빨리 하고 끝내버려요. 미야 아츠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극은 제가 알아보고 말씀을 드릴게요. 늦어도 내일까지는. 그는 스가와라 코우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처럼 아주 작은 동작으로 인사를 하고 둘은 흩어졌다. 스가와라 코우시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렸고 미야 아츠무는 계단을 내려갔다. 본관에 나와 맞딱드린 교정은 봄이었고 대기에 그 기운이 만연했다. 미야 아츠무는 다시 봄과 나쁘다는 단어를 떠올렸다. 스가와라 코우시는 봄과 나쁨의 어드메에도 접하지 않는 존재라고 그는 정의했다. 부드럽고 밝은데 또 부드럽고 밝지가 않았다. 흰데 빛나지가 않았다. 그 생각은 지금처럼, 침대에 누워 천장의 형광등을 바라볼 때까지 계속되었다. 길게 이어지는 생각엔 종착지가 없었다. 애초에 길을 원하고 하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미야 아츠무는 불을 끄고 눈을 감았다. 꿈에선 온통 구름과 안개로 가득찬 곳이 나와 그는 눈을 뜨고 있음에도 한 치 앞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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