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눈을 뜬 오이카와를 반긴 것은 언제나 그래왔듯 작열하는 태양빛이었다. 밝은 빛에 익숙해지지 않아 몇 분을 눈가를 찡그리는 데에 할애했다. 닫힌 문을 열고 나온 오이카와는 매캐한 담배냄새에 겨우 폈던 눈가를 다시 찡그렸다. 차의 보닛 위에 걸터앉아 사이좋게 맞담배를 피우던 형제는 오이카와와 마찬가지로 잠이 덜 깬 얼굴이었다. 고개를 살짝 까닥이며 인사하자 스가와라가 담배를 쥐고 있던 손을 흔들었다. 쿠로오는 두어 번 더 필터를 빨아들이곤 어디서 꺼냈는지 모를 물을 수건에 묻혀 얼굴을 닦았다. 여즉 담배를 태우는 스가와라의 옆에 앉아 오이카와는 길게 하품했다.
“피곤하죠? 잠자리가 영 편하질 않았을 테니까.”
“조금이요. 그래도 길보단 낫죠.”
오이카와의 대답에 스가와라는 웃었다. 소리없이 웃는 얼굴은 자욱한 담배연기와 합쳐져 금방이라도 스러질 것 같기도, 이세상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스가와라는 고개를 반대로 돌려 깊이 숨을 들이쉬곤 필터까지 타버린 담배를 멀리 던졌다. 내쉬는 숨이 길었다.
“오늘은 제대로 된 곳에서 묵을 수 있을 거예요. 캘리포니아 근처까지 왔다고 했으니까.”
오이카와는 고개를 끄덕이며 도시에 가 할 일들을 생각했다. 비행기표를 잡고, 가족들에게 연락하고, 경찰서에 들러야 할지도 몰랐다. 그리고 작별을 준비해야했다. 이건 필연적이었다. 오이카와는 문득 서글픈 마음이 들어 고개를 돌리고 저 멀리의 선인장을 바라보았다. 서부의 풍경을 더는 보지 못한다는 아쉬움 정도로 오이카와는 이 감정을 정의하기로 했다. 어디나 똑같고, 이젠 거의 보잘 것 없게 느껴지는 모습이었지만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스가와라는 언제 세수를 했는지 물기 어린 얼굴로 마른 수건을 건넸다. 오이카와는 물을 수건에 묻혀 얼굴과 목 언저리를 문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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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이 이어진 도로를 달리는 내내 스가와라는 책을 읽고 음악을 듣느라 분주했다. 글로브 박스에서 새 책을 꺼낸 스가와라는 한참동안 책을 들여다 보았다. 오이카와는 곁눈질로 책의 표지를 살폈다. 안나 카레니나. 톨스토이였는지, 도스토예프스키였는지 순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 책 읽어봤어요?”
“아뇨. 너무 긴데다가... 러시아 글은 읽기가 어려워서요.”
“첫 문장은 들어봤죠?”
“글쎄요. 기억이 잘.”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명문名文이에요. 정말 좋아해요.”
불행한 가정의 사람으로서 사랑하지 않을 수 없잖아요. 스가와라의 말에 오이카와는 이렇다 할만 한 대답을 하진 못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그로서는 최선이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쿠로오가 라디오의 볼륨을 높였다. 몇 주 째 빌보드 차트의 1위를 내어주지 않는다던 노래가 울렸다. 그 한곡이 채 넘어가기도 전에 스가와라는 신경질적으로 다른 주파수를 찾았다. 도무지 들어줄 수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몇 번인가 버튼을 조작하던 스가와라는 한 채널에서 손가락을 멈췄다. 적게 잡아도 삼십 년은 되었을 노래가 차 안에 가득 퍼졌다.
“구려.”
“왜 좋잖아. 이미 버려지고 반쯤 잊혀진 것들이 마음 편해. 불안하지 않으니까. 난 이런 점에선 미국인들이 좋아. 자신들의 옛날을 사랑해 마지않는 거.”
쿠로오의 일갈에도 스가와라는 꽤나 그럴싸하게 그 옛날 노래를 변호했다. 웰컴 투 디 호텔 캘리포니아아아. 서치 어 러블리 플레이스... 질책이 퍽 기분나빴는지 스가와라는 소리내어 노래를 부르기까지 했다. 나쁘지는 않은 선곡이라고 오이카와는 생각했다. 상황에 잘 맞는 음악이었다. 호텔 캘리포니아에 어서 오세요오오. 이 어찌나 사랑스러운 곳인가요. 물론 얼마가지 않아 묵을 호텔에선 이렇게 인사하지 않겠지만. 오이카와는 기타 소리를 들으며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기타 리프만으로도 쓸만 한 곡이었다. 이후로 케케묵은 몇 노래들을 듣고 나서야 스가와라는 라디오를 쿠로오에게 맡겼다. 들려오는 노래들은 귀를 거쳐 사막으로 묻혔다. 창밖에선 눈에 걸리적대는 것들이 많아졌다. 도시와 가까워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거의 무너졌다고 무방한 식당에서 아침 겸 점심 끼니를 해결하고 해가 정수리 바로 위를 완전히 벗어나고 나서야 보라색 차는 묵을만 한 호텔에 멈췄다. 축 처진 눈의 사십대 쯤 되어보이는 여자는 역시나 호텔 캘리포니아를 부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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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방을 잡고 키를 받은 오이카와는 방에 들어가자마자 침대에 몸을 던졌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안락함이었다. 발을 까딱일 때마다 울리는 스프링 소리는 무시하기로 했다. 두어 번 좁은 침대 위를 구른 오이카와는 끄트머리의 칠이 벗겨진 천장을 응시했다. 벽지의 무늬가 총 몇개로 이루어졌는지 궁금했지만 세는 것은 그만두었다. 굳게 닫힌 창문 너머의 일몰을 바라보았다. 구름이 분홍색이었다. 눈을 꾹 감고 뜨는 것과 동시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오이카와는 느릿하게 일어나 문을 열었다. 문틀에 팔꿈치를 댄 채 기대 선 스가와라가 있었다.
“섹시한 포즈네요.”
“이정도는 돼야 문 열어줄 것 같아서. 들어가도 되죠?”
오이카와는 동의의 표시로 어깨를 방쪽으로 살짝 젖혔다. 스가와라는 고양이 같은 몸짓으로 그 틈을 파고들었다. 침대 맞은 편에 마련된 작은 테이블과 의자 두 개는 싱글베드의 방에는 맞지 않는 것이라 생각했었지만 오이카와는 곧 생각을 고쳤다. 불시의 방문도 예상하는 호텔 주인의 배려심과 아무 생각 없이 가구를 두었을 그의 행동을 기막히게 꾸며낸 자신에게 속으로 박수를 보냈다.
“내 방보단 좁네요. 그래도 이 방엔 의자가 두 개나 있으니까. 저기 턴테이블도 있네요. 뭐 거의 스위트룸인데?”
창 밑에 놓여진 턴테이블을 가리키며 스가와라가 말했다.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난 그는 창가로 가 턴테이블을 둘러보았다.
“먼지 봐. 청소를 전혀 안 하나봐요.”
“작동은 안 될 것 같죠?”
“바늘이나 한번 올려볼까요?”
오이카와가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스가와라는 바늘을 먼지 쌓인 LP 위에 올렸다. 몇번인가 잡음이 들렸으나 스가와라가 입바람으로 먼지를 털어내자 꽤 선명한 소리가 들렸다. 오이카와도 들어본 적이 있는 음악이었다. 물론 제목은 알지 못했다. 어깨를 몇번인가 들썩인 스가와라는 자리에서 일어서 오이카와에게 다가와 말했다.
“우리 춤춰요. 이렇게 좋은 음악인데 춤을 안 출 수는 없잖아요.”
말을 마치고 곧바로 손바닥이 보이도록 두 손을 내미는 것에 오이카와는 말이 채 이해가 되지 않았음에도 그 손을 맞잡았다. 스가와라는 아까처럼 몇번 어깨를 들썩이곤 발을 앞뒤로 움직였다. 오이카와도 곧 따라했다. 혹여 발을 밟을까 아래만 내려다보고 있던 시선을 조금 올리자 스가와라와 눈이 마주쳤다. 불에라도 덴 듯 급히 고개를 숙이는 오이카와에 스가와라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비슷한 리듬의 곡들이 서너번 반복되었고 비슷한 움직임 또한 그와 비례해 반복되었다. 오이카와는 점점 고개를 들었고 마지막 음악이 흘러나올 쯤엔 스가와라와 눈을 맞추고 있었다.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했으나 스가와라가 눈을 감지 않아서 키스하는 것은 그만두었다.
음악이 멎고 스가와라는 기다렸다는 듯 울음을 터트렸다. 소리내지 않고 우는 것에 오이카와는 기꺼이 움켜잡을 셔츠의 가슴팍과 품을 내어주었다. 스가와라는 곧 오이카와의 목에 팔을 감고 어깻죽지를 눈물로 적셨다. 어깨를 감싸주는 것 밖에는 더 해줄 일이 없었다. 함께 춤을 췄던 시간과 비슷하게, 아니 어쩌면 더 긴 시간을 울고 내버려두는 데에 할애한 스가와라와 오이카와는 미리 말을 맞추기라도 한 듯 떨어졌고 스가와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섰다. 오이카와는 스가와라가 앉았던 의자에 앉아 축축한 어깨를 만졌다. 해는 거의 져 창밖이 붉었다. 마른세수를 몇번인가 한 오이카와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잔뜩 구겨진 종이봉투를 옆구리에 낀 쿠로오였다. 개인실에 찾아오는 손님이 지나치게 많은 것 같다고 오이카와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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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와라가 우는 것을 봤다고 먼저 입을 뗀 쿠로오는 허락도 구하지 않고 침대에 걸터앉아 주머니 속에 넣어두었던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불을 붙이는 것을 보고 오이카와는 그의 무례를 지적하는 대신 창문을 열었다. 천장을 향해 연기를 내뿜은 쿠로오는 왼손으로 머리를 몇번 쓸어올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대충 예상은 했지만 또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기도 했다. 아주 간결하게 요약하자면 그와 스가와라는 아버지가 같은, 이복형제라고 했다. 스가와라의 어머니는 소위 말하는 본처였고 그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하룻밤 연인이었으나 자신을 낳자마자 집 대문 앞에 두고(그는 버렸다고 표현했지만) 가서 얼굴을 본 적은 없다고. 아버지와는 전혀 닮지 않은 얼굴이니 저처럼 생긴 여자일 것이라 대충 짐작한다고 웃으며 말했다. 집안은 퍽 유복해서 금전적 부족함은 없이 자랐지만 아버지는 천성이 밖으로 도는 이였고 지병이 있던 스가와라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정신을 차려보니 기댈 사람이 서로 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도 했다. 스가와라의 어머니의 장례를 치른지 두 달이 채 되지 않아서 새어머니가 집에 들어왔고 그 후로 얼마 지나지않아 아버지가 교통사고를 당해 명을 달리했다는 말로 이야기는 끝을 맺었다. 유산 상속이 끝나자마자 둘은 집을 나왔다고 했다. 그 이후로는 동부에 발도 들이지 않았다는 말도 따랐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오이카와는 한가지의 질문만 덧붙였다.
“왜 저한테 이런 이야기를 하세요?”
“코우시가 우니까.”
우니까. 쓴 약 같은 말을 혀끝에서 굴리다 침을 삼켰다. 아마도 세번째 쯤 될 담배꽁초를 침대헤드 위 벽에 비벼 끈 쿠로오는 봉투를 들고 일어서며 말했다.
“밖으로 나와요. 불꽃놀이 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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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 나와있었는지 스가와라는 밖에 서 있었다. 붉은 눈가가 여즉 남은 울음기 때문인지 노을 때문인지는 묻지 않기로 했다. 늦었다는 모나지 않은 힐난에 쿠로오는 손에 쥐고 있던 봉투를 벌려 안에 든 것을 꺼냈다. 일본에서도 본 적이 있는 얇은 막대폭죽이었다. 꼭 시멘트를 발라놓은 듯 못생겨서 저기서 별빛이 튄다는 것이 보고도 믿기지가 않았더랬다. 오이카와와 스가와라에게 막대를 하나씩 건넨 쿠로오는 주머니 속 라이터를 꺼내 끄트머리에 불을 붙였다. 곧 막대 끝에서 타닥대는 소리를 내며 불빛이 튀었다. 노란 별빛 같은 것이 타들어가는 것을 바라보던 셋은 그 행동을 두어번 쯤 더 반복했다. 마지막엔 막대가 두 개 밖에 남지 않아서 쿠로오는 오이카와와 스가와라에게 막대를 건네곤 호텔로 들어가버렸다. 스가와라는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고 불을 붙였다. 오이카와의 것에 불이 더디게 붙어 동시에 타들어가지 못했다. 사실 오이카와는 그 알량한 불빛 자체보다도 스가와라의 눈동자 속 빛에 더 관심이 많았다. 고개를 숙인 채로 스가와라는 입을 열었다.
“어차피 금방 사라져버릴 거라면 예쁜 게 더 좋아요. 난 그걸 너무 일찍 깨달아버렸어.”
곧 막대 끝 빛이 사그라들었고 오이카와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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