찻잔 속의 소용돌이에 빨려들어 죽어버린다면. 시라부는 한참을 휘젓고 있던 티스푼을 찻잔 속에서 빼냈다. 설탕을 녹이려던 본래의 목적은 달성된지 오래였다. 허우적대다가 끝내 그 물결에 순응해 눈을 감아버린다면, 그런 나를 위해 울어줄 사람이 몇이나 있나. 따듯하다 못해 뜨거운 김을 뿜어내는 차를 내려다보았다. 창 밖에선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일주일째 이어진 비는 지긋지긋한 우기의 시작이었다. 한동안은 공기 중의 질척함이 가시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아직 뜨거운 홍차를 꿀꺽 삼켰다. 혀끝이 쓰라렸고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느낌이 생경했다.
실크넥타이로 목을 매단 것은 괜찮은 선택이었다, 라고 시라부는 생각했다. 그의 외모를 칭찬할 때마다 빠지지 않는 부분인 희고 긴 목에는 그날의 흔적이 없다. 고운 천으로 감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만 속으로는 그렇지가 못한지 꼭 그날처럼 비가 오는 때면 무언가에 눌린 듯 턱 막혀버린 느낌이 목덜미를 감쌌다. 사실 목 뿐만아니라 온몸이 그랬다. 시라부는 우기 때면 일년에 아플 총량을 한꺼번에 끌어다 온 사람처럼 앓았다. 가쁜 숨을 몰아쉬고 열에 뒤척였다. 그것이 제 연인 또한 아프게 만든다는 것을 시라부는 잘 알고 있었다. 걱정스럽다는 표정에 힘을 들여 웃는 것은 마냥 쉽지만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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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싫었다. 낙하하는 모든 것들이 불쾌했다. 자신이 그러했고 연인 또한 그러했다. 아직도 생생했다. 보라색이 아닌 다른 유니폼을 입은 그가 스파이크를 치키 위해 뛰었던 그 순간을. 흰 운동화가 땅에서 떨어지고 왼손에 맞아떨어진 공이 날카롭게 반대편의 코트를 가른 것은 여느 때와 같았다. 다만 그 이후는 전 같지가 못해서, 우시지마는 두 다리로 서지 못하고 무릎을 감싸쥔 채 옆으로 고꾸라졌다. 경기가 중단되고, 팀닥터가 코트에 들어가고, 들것에 실린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는 그 일련의 사건들을 시라부는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갑자기 들이닥친 것들에 몸이, 정신이 깨져버려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것이라고 아주 나중에서야 시라부는 생각할 수 있었다. 예고도 없이 불행은 들이닥쳤다. 시라부는 모든 일의 원인을 그날 세상 모든 것을 지워내겠다는 듯이 내리던 비의 탓으로 돌리기로 했다. 여느 때와 다른 것은 그것 밖엔 없었으므로.
무릎을 혹사시킨 대가라고 했다. 인대가 완전히 파열되었다고. 중학교 때부터 오로지 그를 향해 올라갔던 공과 기대가 퇴적된 결과였다. 강하고 아름다웠던 만큼 그의 몸은 삭아들어가고 있었다. 재활 훈련을 잘 받는다면 일상 생활엔 무리가 없을 것이라 했다. 그렇다면 배구는. 조심스럽지만 곧은 질문에 의사는 고개를 저었다. 십여년간의 서사는 그렇게 갑작스럽게 마침표를 찍었다. 의사 앞에서 퍽이나 담담해 보였던 그는 일인실의 침대에 눕자마자 소리없이 울었다. 시라부는 그의 어깨를 도닥이거나 머리를 끌어안는 대신 조용히 문을 열고 나가는 것을 택했다. 그 무엇도 그를 위로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길지 않은 인생에서 아마도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던 것을 전부 잃는 감각을 시라부는 알지 못했다. 괜찮다거나 힘내라는 말은 독이 될 것이 뻔했다. 그정도는 알 수 있었다.
거의 모든 것들에 성실했던 그답게 재활은 순조로웠다. 시라부는 학부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병원을 찾았다. 환자복을 입은 모습은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 소매가 짧은 배구복은 그에겐 거의 피부와 같은 것이었으리라고 시라부는 생각했다. 가장 잘 어울리기도 했다. 퇴원을 하던 날엔 손을 잡고 하이라이스를 먹으러 갔다. 고등학교 방과 후에 자주 찾던 곳이었다. 가게는 여전했다. 사람 좋은 얼굴로 웃는 주인 아저씨도 인테리어도. 여전하지 못한 것들이 침입할 틈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갑자기 쏟아진 소나기에 편의점에서 산 작은 우산 아래서 둘은 함께 걸었다. 어깨가 축축하게 젖어들어갔다. 집 앞에서 손을 흔들고 헤어진 후 급하게 현관문을 열어젖힌 시라부는 신발도 벗지 않고 화장실로 뛰쳐들어가 변기에 모든 것을 게워냈다. 채 소화되지 않은 음식, 시큼한 위액, 약간의 눈물과 건네지 못해 응어리진 채 굳어버린 말까지 다. 헤아릴 수도 없는 과거에 아담이 삼킨 사과가 걸렸다던 흔적을 쓸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때부터 목이 아팠던 것 같다. 그날 밤, 시라부는 우시지마에게서 헤어지자는 내용의 문자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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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부는 찻잔 가장자리의 입술이 닿았던 부분을 엄지손가락으로 쓸었다. 과거의 기억은 그날 어깨로 스며들었던 물기처럼 그에게로 침투했다. 창틀에 잔을 내려두고 턴테이블 앞에 섰다. 이미 올려져 있는 판 위로 바늘을 내렸다. 소프라노의 목소리가 습한 거실을 가득 채웠다. 시라부의 취향도 그의 취향도 아니었다. 전 집주인이 두고 간 컬렉션은 영국의 겨울엔 어울렸다. 축축하고 사람을 기저로 끌어내리는 감각이 확연하다는 뜻이었다. 시라부는 도로 바늘을 올리지 않았다. 다시 창가로 돌아와 이젠 조금 식은 차를 머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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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심은 쉬웠다. 행동도 마찬가지였다. 문자의 내용을 인지하자마자 시라부는 옷장 문을 열고 서랍 가장 안쪽에 두었던 넥타이를 꺼냈다. 지문 틈으로 스며들기라도 할 듯 부드러운 재질의 타이는 그가 준 것이었다. 고등학교 졸업선물. 후배에게 주기엔 이상한 선물이었을지 몰라도 연인에겐 적합한 것이었다. 얼핏 검정색으로 보일 만큼 어두운 청록색 바탕에 모래색 스티치가 들어간 타이를 내밀며 그는 졸업을 축하한다고 말했었다. 주는 얼굴에, 받는 손에 벚꽃의 분홍색이 물들던 때였다. 여름마다 모기장을 거는 고리에 타이를 감아 메며 시라부는 그날을 찬찬히 기억해냈다. 그날의 하늘이 아주 연한 푸른색이었다는 것을 떠올림과 거의 동시에 시라부는 매듭을 완성했다. 조금 어색한 느낌이 드는 것을 무시하며 시라부는 원 안으로 머리를 집어넣었다. 숨을 깊게 내쉬고 발 밑의 의자를 힘껏 걷어찼다. 엄청난 압박감이 목을 옥죄었다. 천을 붙잡고 버둥대던 시라부는 눈물이 가득 차 흐려진 시야가 좁아지는 것을 느꼈다. 눈을 감으려는 순간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모자란 숨을 급하게 들이마시며 시라부는 넥타이의 끝을 노려보았다. 고리에 맸던 끝이 풀려있었다. 실패는 어색한 솜씨와 지나치게 매끄러운 천의 합작품이었다. 시라부는 패악을 부리듯 기침했다. 아들의 방에서 난 둔탁한 소리와 거친 기침소리에 달려온 부모는 마치 짜여진 각본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병원에 입원했다. 정확히는 시라부의 부모가 입원'시켰다'. 가장 먼저 찾아온 손님은 그였다. 우시지마는 침대에 등을 기대고 앉아있는 시라부를 바라보았다. 어쩔줄 모르는 표정을 한 그는 목덜미를 만지려했으나 이내 손을 거두곤 무릎을 꿇어 침대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울음을 목격하는 것 같다, 고 시라부는 생각했다. 그는 이번에도 우시지마에게 손을 뻗지 않았다. 흔들리는 어깨를 내려다 볼 뿐이었다. 그는 쏟아내듯 울며 말했다. 상실한 자신이 저에게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고. 바보같은 소리였지만 그답다고 생각했다. 고개를 들기에 손을 뻗어 눈물을 닦아주었다. 눈을 마주한다면 무엇이든 해줄 수 있었다. 헐떡대던 숨소리가 잦아들고 평정을 찾자 그는 유학을 간다는 말을 꺼냈다. 몇 다리를 건너 아는 사람이 런던의 대학에서 교수직을 맡고 있다고 했다. 병원에 있을 때부터 준비했고 날짜가 정해졌다는 말도 덧붙였다. 시라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시지마는 한참을 시라부의 손을 만지고 해가 질 때 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또 오겠다는 말에 그날처럼 손을 흔들었다.
목을 부여잡고 숨을 갈구하던 그 때 눈이 마주친 이후로 부모가 자신에게 일종의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시라부는 진작 알아차리고 있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그를 다뤘다. 지나치게 조심스러웠고 눈치를 살폈다. 아무 이유 없이 제 방에서 목을 멘 아들을 대하는 법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침대 옆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서있는 그들에게 시라부는 유학을 가고싶다는 말을 꺼냈다. 당황이 스치는 얼굴에 고등학교 때의 선배와 동행할 것이라 말하니 조금 나중에 이야기하자는 답이 돌아왔다. 반대하지 않을 것은 말을 꺼내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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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부와 우시지마는 같은 비행기를 타고 영국으로 향했다. 열 시간이 넘는 비행 중에도 시라부는 잠을 자지 않았다. 창공에 모든 것을 버리겠다는 일념으로 그는 비행에 임했다. 땅보다 구름이 익숙해질 즈음 착륙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느낀 것은 축축하다는 감각이었다. 눅진한 냄새가 공항에, 대기에 가득했다. 제 몸만 한 가방을 끌고 얻어놓은 집에 들어설 때 쯤엔 이미 해가 져 있었다. 저녁을 먹기에도 이른 시간인데 해는 자취를 감췄다. 불을 켜고 겉옷을 벗고 방으로 들어갔다. 기본적인 가구만 들어찬 방, 시트도 깔지않은 침대 위에서 둘은 몸을 섞었다. 연약한 침대 스프링이 지르는 비명과 가쁜 숨소리가 방을 가득 채웠다. 시라부의 골반을 잡은 우시지마의 손이 자꾸만 미끄러졌다. 땀 혹은 이 나라에 만연한 음습함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은 이상에야 그렇게나 손 틈 사이로 빠져나갈 리가 없었다.
오랫동안 지속된 섹스의 끝에서 시라부는 조금 울었던 것도 같았다. 쾌락 때문인지, 만족감 때문인지 아니면 서러워서였는지는 본인조차도 알지 못했다. 사실 울었던 건지 아닌지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날 새벽부터 시라부는 호되게 앓았다. 쏟아져 내리는 비만큼 식은 땀을 흘렸다. 바뀐 환경에 대한 신고식이라 하기에도 화려했다. 며칠간 부지런히 이마의 물수건을 갈고 씹히는 것 없는 음식을 먹여주던 연인은 허리를 세워 앉을 수 있게 된 시라부에게 밀크티를 건넸다. 이 나라 사람들의 문화 같은 것이라 했다. 혀가 데일 정도로 뜨거운 것을 시라부는 잘도 마셨다. 우습게도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그 감각에 살아있다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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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실을 가득 채웠던 소리가 멎었다. 시라부는 컵을 든 채로 턴테이블의 바늘을 원래의 자리로 옮겼다. 적막의 틈새로 빗방울이 창을 때리는 소리가 끼어들었다. 영국은 썩 좋은 유학지는 아니었다. 물가가 비쌌고 날씨도 그닥이었다. 잰 체하는 문화도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차 문화만큼은 높이 살만 하다고 생각했다. 홍차는 혀끝에서 맴도는 말을 함께 넘겨버리기에 좋았다. 투명해 찻잔 바닥의 꽃무늬가 보이는 것도 괜찮았고 아예 우유를 섞어 깊이를 가늠하지 못하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죽는다면, 설탕이 녹아든 차의 소용돌이에 끼어 눈을 감고 싶다고 시라부는 종종 생각했다. 그것이 찻물이든, 삶에 대한 권태이든간에 축축하게 젖은 자신을 보고 눈물 흘려줄 이는, 사실 단 한명이면 되었다.
시라부는 빗소리에 맞춰 왈츠를 추듯 발을 움직였다. 발목을 움직여 몸을 돌리고 가구 사이를 유려하게 걸어다녔다. 온다면, 함께 춤을 추자고 청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난감한 듯한 얼굴을 하고도 손과 허리를 감쌀 것을 알고 있었다. 그의 연인은 항상 그랬다. 단 둘이만 있는 곳으로 떠나자해도 고개를 끄덕일 사람이었다. 시라부는 지금의 생활에 만족했으므로 그런 청은 보류되었지만. 서로에게 만큼은 대책없는 이 관계가 사랑스럽다고 시라부는 생각했다. 그는 옛 노래를 허밍으로 흥얼댔다. 과거 이 나라에서 가장 인기있던 밴드의 노래였다. 넌 나를 구원해줄 단 한 사람이야. 시라부는 그 가사가 들어가는 부분의 멜로디를 반복했다. 넌 나를 구원해줄 단 한 사람이야. 너는, 나를, 구원해 줄, 단, 한, 사람이야.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라부는 들고있던 잔을 단숨에 비워냈다. 춤을 추기 이전에 함께 노래를 듣자고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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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급되는 음악은 순서대로
Miriam Gauci - La Wally
Oasis - Wonderwall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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