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에 취한 얼굴이 저 위에서 떨어지는 꽃잎 같았다. 흰 얼굴에 붉은 빛이 물들듯이 퍼진 게 그랬고 야들하고 얇아 보이는 것도 그랬다. 오이카와는 제 옆에 앉은 선배를 보면서 떨어지는 벚꽃 잎을 한 번에 잡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속설을 떠올렸다. 사랑의 어두에 ‘첫’이 들어가는지 안 들어가는지는 그닥 중요치 않다고 생각했다. 근 2개월간을 저 좋다고 따라다니던 선배는 귀여웠고 지금은 기분이 좋은지 제 옆에 앉아서 아이처럼 발장난을 치고 있었다. 이정도면 딱 괜찮다고 생각했다. 숨을 깊게 내쉬자 위를 향했던 얼굴이 틀어졌다.
“안 좋은 일 있어?”
얼굴만큼이나 단정하고 깔끔하던 평소의 말투와는 달리 끝이 늘어졌다. 아뇨. 없어요. 없는데... 오이카와는 마른세수를 하며 말끝을 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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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선배는, 문학부 설탕선배 스가와라 코우시는 자신을 좋아한다. 저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티를 내면서도 들키지 않을 거란 확신을 갖는다. 저가 좋아하는 우유빵에 뜨끈한 커피를 두고 쪽지까지 남기면서도 그 나름의 비밀작전을 완수한 것에 웃는 얼굴로 돌아서는 게 어이가 없으면서도 예뻐서, 너무 귀여워서 오이카와는 조금만 더 두고 보기로 했었다. 철석같이 믿고 있는 설탕선배한테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말할 날만을 기다렸다. 놀란 표정이랑 새빨개진 얼굴을 보면서 오늘부터 1일하자는 유치한 말을 꺼낼까도 생각했었다. 엠티에 오는 것도 대충은 예상했다. 1학년은 엠티 참가가 거의 강제였고 그랬기에 스가와라는 2학년 중에선 드물게 엠티에 동행했다. 순전히 오이카와 때문임을 본인들도 다른 사람들도 알고 있었다. 버스 안에서 오이카와의 옆자리 쟁탈전이 일어나지 않고 비워져 있던 것도, 초저녁부터 시작된 술자리에서도 마찬가지로 맞은편 자리에 아무도 앉지 않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딴에는 아주 자연스럽게였지만, 일부러 자신을 위해 마련해둔 자리에 앉은 스가와라는 그때부터 동그란 눈이 제대로 뜨인 적이 없었다.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내내 생글생글 웃는 얼굴이어서 저래도 되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술고래로 소문이 난 것이 무색하게 금방 취해버려서 얼굴 근육이 마시멜로처럼 말랑하게 풀어져버렸다. 말리는 동기에게 경치가 너무 좋아서 기분이 좋아져 막 들어가버린다는 변명 아닌 변명을 애교스럽게 내뱉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풀어진 얼굴이 정면의 후배를 볼 때는 수줍음을 한 겹 더 얹어서 달라지는 것도 꽤 쏠쏠한 구경이었다. 오이카와는 제 옆의 동기들과 이야기를 하는 체 하면서도 사실 온 신경을 제 앞의 선배에게로 쏟고 있었더랬다. 낯빛이 입고 있는 연한 분홍색 니트처럼 변한 게 귀여웠다. 저가 고개를 돌리고 있을 땐 주인 바라보는 강아지마냥 금방이라도 낑낑대는 소리를 낼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정작 눈이 마주칠라치면 홱 고개를 돌려버리는 건 무슨 게임 같기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오이카와는 기분이 좋았다.
스가와라가 옆의 제 동기 놈의 어깨에 기대기 전까진 그랬다. 모리시타가 테이블 위에 올려진 스가와라의 손을 슬슬 쓸고 자꾸만 잔이 비었다며 술을 따라주는 것을 오이카와는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스가와라가 저를 좋아하는 것만큼이나 공공연하게 설탕선배를 좋아한다고 티를 내던 녀석이었다. 소꿉친구인 이와이즈미는 종종 그런 말을 했다. 덜 자란 놈이라고. 180도 못넘은 사람에게 그런 말 듣고싶지 않다며 놀리는 것으로 답했지만 오이카와는 그 말에 긍정했다. 질투심 많고 영악한 어린 아이 같은 마음이 속에서 끓어올랐다. 오이카와는 들고 있던 잔을 내려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을 돌아 스가와라의 뒤에 섰다.
“선배 너무 취하셨네. 바람이라도 쐬고 올래요?”
스가와라의 어깨를 살살 쓸며 하는 말에 모리시타가 고개를 돌렸다.
“뭘 오이카와 네가 굳이. 인기인은 앉아 있어야지. 선배는 내가 데리고 나갈게.”
이렇게 나오신다 이거지. 오이카와는 이미 예상을 했던 차였다. 조금 치사한 방법을 쓰는 것도 대충 생각은 해놓았다. 어깨를 쓸던 손을 멈추자 스가와라가 고개를 돌렸다. 선배.
“저랑 나갈래요. 모리시타랑 나갈래요?”
스가와라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입을 떼었다. 오이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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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카와는 자신이 기억하는 한의 과거에서부터 언제나 인기가 많았다. 어른들에겐 싹싹하고 예쁜 아이라고 칭찬받았고 또래에겐 잘생긴 얼굴과 타고난 서글서글함으로 친해지고 싶은 아이로 군림했었다. 오이카와는 그들에게 딱 적당한 정도의 친절로 답했다. 이하로 떨어지는 일은 몇 있었어도 그 이상으로 대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더 확고해지는 그만의 룰에 이 같은 과 선배는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렇게 좋아 죽겠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왜 고백은 안하는지. 좋아한다는 완전한 말이 아니더라도 전공을 한껏 살려 나츠메 소세키처럼 달이 아름답다고만 해줘도 오이카와는 기꺼이 웃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근데 왜 고백을 안 해. 좋아한다고 직접 말한 적도 없는 빵을 어떻게 알았는지 매번 사물함 안에 두면서, 이렇게 바로 옆에 앉아서 힐끔대면서 얼굴을 쳐다보는 게 느껴지는데 왜 고백을 안 해.
“선배.”
“응?”
“제가 좋으면,”
고백을 하셔야죠. 이렇게 충동적일 거라곤 오이카와도 생각하지 못했다. 최대한 모르는 척 즐기고서 침 발라놓으려던 계획이 다 무너졌다. 그래도 이 놀란 표정만큼은 계획에 있던 것보다도 더 극적이어서 오이카와는 조금 안심이 되었던 것도 같았다.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몰라요.”
오이카와의 말에 스가와라는 얼굴을 두 손 안으로 숨겼다. 귀까지 새빨개져서 건드리면 톡 터져버릴 것 같아 겁이 나서 꼭 주먹을 쥐어 손가락을 숨겼다. 오이카와는 팔을 뒤로 짚고 고개를 들어올렸다. 평상 뒤 벚나무엔 꽃이 만발했다. 선배한테 저 꽃을 닮았다고 말하면 기분나빠하려나. 근데 은유적인 그런 게 아니고 진짜 닮았는데. 작게 재채기하는 소리가 들려 오이카와는 몸을 바로했다. 몇 번인가 더 이어진 재채기에 오이카와는 입고 있던 후드 집업을 벗어 스가와라의 어깨에 둘렀다. 얼굴이 가까워졌고 스가와라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렸다. 눈이 마주쳐버렸다.
아무래도 좋다고, 오이카와는 생각했다. 누가 먼저 고백하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누구든 해버리면 그만인 거지. 오이카와는 무릎 위에 올려진 스가와라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포갰다. 겹쳐진 손을 바라보던 스가와라가 고개를 들었다.
“선배가 안하니까 제가 먼저 할게요. 저 선배를...”
입을 마저 떼려는 순간 스가와라는 술 취한 사람이라곤 생각할 수 없는 날랜 동작으로 오이카와를 껴안았다. 당황한 오이카와는 항복이라도 하는 듯 손을 든 채로 작은 머리통을 바라보았다.
“선배?”
“너 진짜 잘생겼다. 진짜 너무 잘생겼어. 착하진 않은데, 응 잘생겼으니까 괜찮아. 너 얼굴 최고니까.”
다시 기분이 좋아졌는지 흥흥하는 콧바람 소리까지 내며 몸을 좌우로 흔드는 것에 오이카와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리 술에 취했다지만 너무한 타이밍이잖아. 오이카와는 여즉 들고 있던 손을 스가와라의 등 위로 둘렀다. 힘을 주어 당기니 따라오는 몸이 따끈했다. 저 좋다는 놈이 얼마나 많은지 이 선배는 알기나하나 싶다가도 결국 자신만 좋아한다는 결론에 웃을 수밖에 없었다. 꼭 오늘이 아니어도 괜찮았다. 내일해도, 모레에 해도 되니까. 더 좋아지면 몰라도 마음이 없어지진 않을 테니까. 바람이 퍽 세게 불어 꽃잎이 휘날렸다. 침침한 가로등 불빛을 받은 꽃잎이 예뻤고 품 안의 선배는 더 예뻤다. 목덜미에 느껴지는 결 좋은 머리카락을 손을 들어 쓸었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드는 감촉이 사랑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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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와. 혹시 밖에서 스가랑 오이카와 봤어?”
“둘이 저 평상에서 껴안고 있던데요.”
“껴안고 있었다고?”
“야. 스가랑 오이카와랑 둘이 껴안았댄다!”
“스가선배랑 오이카와랑 껴안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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