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 안이 너무 답답해서 환기를 하려고 창문을 열었는데 달이 보이더라고요. 꽉 찬 보름달에 심지어 푸른빛마저 돌아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날 뻔했어요. 언제나 이래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불쑥. 어디에서나 당신이 도사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얼마 전 본가에 가 벽장에 넣을 것들을 골라내고 있는데 그 책이 보이는 거예요. 그 시집이요. 고등학교에 다닐 때 가장 많이 읽었던, 책등이 다 까지고 날개 접히는 부분이 닳아버린 책이 보여서 그 자리에 앉아 꽤 오랫동안 울었어요. 같이 봤었으니까. 이런 것도 읽으냐고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으니까. 그 안에 우리가 있었으니까. 우리, 가 좋았어요. 당신과 나를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게 설레어서 몇 번이고 침대에서 뒤척였어요. 천장이 온통 당신이어서 잠을 못잔 적도 있어요. 어린 취급 할까봐 말은 하지 못했지만.
혹시라도 누군가가 지금까지의 내 삶 중 가장 극렬했던 계절을 물어본다면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여름과 겨울을 말할 거예요. 우리가 되었고 서서히 우리가 아니게 된 계절. 추워질수록, 옷이 두꺼워질수록 그 안에 숨어드는 느낌이었다고 말하면 이해할 수 있을까요? 서서히 멀어져가서, 그게 내 생각보다도 너무 빨라서 늦은 가을쯤엔 다른 의미로 잠을 설쳤어요. 내가 뭔가 잘못한 게 있나. 당신을 실망시킨 일을 했나 싶어서. 어떠한 일의 원인을 무조건 내게서 찾는 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지적받아온 것이긴 하지만 습관 같은 거라 쉽게 저버릴 수는 없는 것 같아요. 우리 사이의 일도,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먼저 생각했고 아직도 그러니까. 또 그렇지 않으면 너무 슬퍼지니까요. 식어버린다는 건 이유가 없다는 데에서 필연적으로 슬퍼지니까. 아픈 거예요. 겨울 내내 앓았어요. 꿈속에서도 내내 아파서 소리도 못 내고 울었어요. 몸을 일으킬 수 있게 되자마자 미야기로 갔는데 당신 얼굴도 못보고 돌아왔고. 예상은 했었어요. 그래도 아프지 않은 건 아니라 돌아가는 기차에서도 계속 볼을 문질렀어요. 집으로 돌아와서 시집을 버리려고 했는데 그러지도 못했어요. 그 단어들과 행간 사이에 우리의 시간이 있었으니까.
당신 혼자 어른이 되어가는 준비를 하는 것 같아서, 그 안에 내가 끼지 못하는 것 같아 슬퍼했어요. 애초에 대학에 갔다는 것도 몇 다리를 건너서야 들을 수 있었으니까. 이름 들으면 알만 한 학교에 가서 그때부터 나도 책상에 앉아있는 시간이 늘었어요. 최소한 부족하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당신은 어른이 되었고 나는 아직도 고등학생이란 이름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혹여 나중이라도 다시 만난다면 그때만큼은 동등해야하니까. 다가가지 못하면 안되잖아요. 고대해 온 순간일 텐데. 나는 당신과 비교해 언제라도 모자를 수밖에 없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아주 조금이라도 그 폭을 좁혀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도쿄의 사립 대학교. 이정도면 열심히 노력했다고 한번쯤 웃어줄 수는 있지 않나요?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전혀 연고도, 관심도 없던 장소가 소중해지는 경험을 해본 적이 있어요? 나에게 미야기가 그랬어요. 도쿄에서 미야기까지 그 짧지 않은 거리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가는 내내 잠 한숨 자지 않았어요. 기차 창밖으로 지나가는 풍경들도 내겐 당신의 일부이니까. 부쩍 맑아진 공기도 당신을 닮아서 난 그 풍경을 사랑했던 것 같아요. 그래도 가장 사랑했던 건 단연 달이었어요. 그 공원 벤치에 앉아서 함께 올려다봤던 푸른 달. 단 한 순간을 박제해서 간직할 수 있다면 나는 그 순간을 택할 거예요. 여름이었지만 바람이 불어 조금 추웠고 그래서 체온이 더 선연하게 느껴졌던 감각을 아직도 기억해요.
마음 한켠을 내어준다는 건 어떤 파급이 올지라도 감내해야한다는 계약에 동의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어요. 반년이 넘는 시간을 꼬박 앓고 있다는 데에서 느낄 수 있으니까. 약을 내게서 찾을 수 있기는 할까요. 우리의 관계에 있어 언제나 무언가를 쥐고 있는 사람은 당신이었는데. 물론 나조차도. 그리고 나는 기꺼이 내던졌고요. 불나방을 알죠? 타들어갈 것을 알면서도 자기 몸을 스스로 이끌어 내던져버리는. 나는 불은 아니고... 그 달이었다고 봐요. 나를 내던진 곳이. 타버리는 게 아니라 아주 천천히 얼려졌다고, 그렇게 생각해요. 이제는 어떤 것에도 전처럼 열정적일 수 없으니까. 짧은 시간에 너무 쏟아부어버린 걸지도 모르겠어요.
그래도 후회는 없으니까 그것만큼은 괜찮은 거 아닐까요.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 해도 나는 그 여름 합숙에 참가할 거고 당신한테 말을 걸고 뻔뻔하게 번호를 알아갈 거예요. 의미 없는 체를 하면서 안부를 묻고 메일을 보내다가 전화를 할 거예요. 이미 표를 예매했으면서 찾아가도 되냐는 물음을 던질 거고 기차 안에서 내내 웃으면서 당신 생각만 할 거예요. 잘 먹지도 못하는 매운 음식을 먹고 그런 나를 보면서 웃는 당신을 바라볼 거예요. 텅 빈 공원에서 같이 달을 보고 고개를 든 당신의 눈 옆 점을 사랑할래요. 응. 난 그럴래요.
창문을 꽤 오래 열어뒀는데도 춥지 않네요. 여름이 다가오고 있다는 증거겠죠. 요즘 들어 창밖이 자주 소란스러운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거예요. 여름은 소란스러우니까요. 가끔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창문은 조금 이따가 닫아도 되겠어요. 바람이 차지 않아서도 있지만 저런 달을 등질 순 없잖아요. 아. 이번 주에 본가에 내려가면 그 시집을 가져올까봐요. 여름이니까요. 단어 사이사이를 샅샅이 털어볼 생각이에요. 음. 방송을 하려나봐요. 벨이 울렸어요. 오늘은 점호가 없는데. 누굴 찾나본데요. 어. 절 찾네요. 1층 로비에서 누가 기다리고 있다고. 온다는 연락을 받은 일이 없는데 누구일까요. 깜짝이라던가 그런 건 썩 달갑지 않은데. 보쿠토 선배가 와세다 대학교 마크가 찍힌 옷을 입고 기숙사 앞까지 왔었다는 거 혹시 알고 있을까요? 그래도 기다리고 있다니 가봐야겠죠. 창문은 다녀온 후에 닫아야겠어요. 그때쯤이면 방 안이 온통 달빛 범벅일 테니까. 그 정도라면 꿈에서라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보고 싶네요. 오늘따라 더. 아주, 많이 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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