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夜



  나는 진정 사는가 싶게 살아 있는 것을

  불꽃 속에서 죽기를 갈망하는 것을 찬미한다.


  괴테, 거룩한 갈망 中






  사실 미야 아츠무의 3학년 1학기 시간표에서 월․수 9시 30분의 희곡의 이해는 그닥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전공도 아닌 2학점짜리 강의는 정말 학점에 구멍이 나지 않게 하려는 의도에서 넣은 것이었고 열심히 임할 생각도, 그렇다고 아예 버릴 생각도 없는 그런 밋밋하고 별 의미 없는 수 많은 강의 중 하나였던 것이다. 프레젠테이션으로 채워진 첫 수업에서조차 미야 아츠무는 제일 구석 뒤편에 앉아 늙은 교수의 말을 흘려듣고 있었다. 2학점 교양 주제에 조별 과제에 발표가 있는 것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10분 여 정도의 짧은 것이라 그나마 다행이라 생각했다. 창 밖엔 봄이 한창이었다. 교정을 가득히 채운 사람들의 표정도 벚나무도 모두 봄이었다. 햇빛이 따듯해서 미야 아츠무는 괜히 기분이 나빠졌다. 기분이, 나쁘다. 나쁘다라. 사소한 단어에 매달리는 것은 그의 특기가 아니었지만 아주 잠깐의 취미가 되긴 했다. 그는 봄과 나쁘다라는 말의 상관관계에 몰입했다. 세간의 인식으로 치면 전혀 관련이 없는 단어였다. 봄은 따듯하고 부드러웠으며 나쁘다는 차갑고 날이 서있었다. 미야 아츠무는 자신이 후자에 더 가까운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태생이 그랬다. 아주 어릴 적의 버릇을 그는 고치지 못했고 사실 고칠 마음도 없었다. 기어가는 곤충을 보면 다리를 떼고 싶었고 돌 틈새로 핀 꽃은 밟아줘야했다. 어린 아이의 순진무구한 잔학함이 ‘어린’이라는 단어에 포함되지 않을 때까지 이어진다면 그건 본성인 거라고,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이유에서 미야 아츠무는 성악성을 신봉했다. 인간은 본디 악하다. 사람을 죽이고 난도질해 뉴스와 신문에 나오는 것만이 악이 아니었다. 흰 것이 있으면 어떤 색으로라도 물들이고 싶어하는 욕망, 그는 그것을 악이라도 규정했다. 또 그러한 연유로 그는 악을 사랑했다. 희기만 한 것은 어쩐지 기분이 나쁜 이유에서였다.

   2인으로 짜여진 조는 교수의 임의였다. 미야 아츠무, 스가와라 코우시. 호명된 이름의 주인은 강의실의 가장 중앙에 앉아 있었다. 불려진 이름에 들린 팔이 하얬다. 다만 형광등 아래서도 반짝인다는 느낌은 없었다. 분을 바른 대리석 같다고 생각했다. 잘 갈아진 대리석 위에 장미가루를 섞은 분을 바른 것 같은 색이라고. 미미한 혈색이 돌았다. 손목 위로 어렴풋이 드러난 핏줄은 파랄 것이다. 보지 않았지만 짐작하건대 그랬다. 어렸을 적 어머니의 치맛바람에 몇년인가를 다녔던 미술학원은 종종 이런식으로 그의 감상을 도왔다. 미야 아츠무는 감상과 먼 사람이니 결국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는 말이었다. 교수는 별 시답잖은 이야기를 몇 번 하더니 조원과 회의를 하라고 했다. 중앙의 회색 머리에게 다가간 미야 아츠무는 손가락을 굽혀 작게 책상을 쳤다. 꾸며낸 미소를 얼굴이 띄우는 것은 아주 오랜 습관이었다. 그는 친절해보이는 얼굴을 잘 알았다. 집에 있는 똑같은 얼굴과 다르게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거울보다도 정확했고 그래서 쉬웠다. 똑, 똑. 문에 노크를 하는 듯한 동작에 스가와라 코우시가 고개를 들었다. 조원이요. 아, 네.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하기에 작게 고개를 까닥여 답했다. 책상을 붙여 앉고 전화번호를 교환하고서도 이렇다 할 말은 나오지 않았다. 대부분의 다른 조가 그랬고 몇 명만이 꽤 소리를 내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연극 좋아하세요?”


  스가와라 코우시의 첫마디는 그거였다. 연극 좋아하세요? 미야 아츠무는 고개를 저었다. 연극은 좋아한다거나 싫어한다는 범주에 끼지 못했다. 아무 생각이 없다는 게 맞았다. 연극은 그에게 생각을 할애할만 한 대상이 아니었다. 그의 부정에도 스가와라 코우시는 실망한다거나 아쉽다는 기색이 없었다. 어색한 사이를 타개할만 한 질문이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마치 예상하기라도 했다는 듯 그는 말을 이었다.


  “저는 좋아해요. 연극.”


  아. 그러세요. 네. 그래요. 그러시구나. 영양가 없는 말이 뒤를 따랐다. 미야 아츠무는 어떤 연극을 좋아하냐던가, 왜 연극을 좋아하냐는 질문도 던지지 않았다. 궁금하지 않았을 뿐더러 흥미없는 이야기를 예의상 이어가는 것은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그는 친절함은 가장할 수 있을지언정 다정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원하는 것을 쉽게 내어주지 않는 성정이었지만 그로서도 스가와라가 그런 질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스가와라는 좀, 아니 많이 희어서 읽기가 어려웠다. 저. 스가와라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배우가 되고 싶었거든요.”


  그러셨구나. 미야 아츠무는 대답을 먼저 내어놓고 이어 생각했다. 배우라. 화려함이 느껴지는 단어는 스가와라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니 배우라는 직업도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스스로 빛을 내고 반짝여 눈을 사로잡는 사람들이라던데 스가와라는 무대에서든 스크린에서든 타인의 눈을 잡아챌만 한 사람은 아니라고. 과거형으로 뱉어진 말이니 그도 그 꿈을 접은 것일지 모른다. 미야 아츠무는 다시 한번 웃었다. 소리는 내지 않고 얼굴로만. 모두가 친절하다고 여기는 그 얼굴이었다.


  “발표는 언제 하도록 할까요?”

   

  배우이니 뭐니 하는 소리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말을 의미만 남겨두고 단어를 재조립해 건넸다. 스가와라는 최대한 빨리 하자고 말했다. 동감이었다. 근처의 극장에서 하는 극이 있어요. 그걸 보고. 네. 발표 시간도 짧으니까요. 최대한 빨리 하고 끝내버려요. 미야 아츠무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극은 제가 알아보고 말씀을 드릴게요. 늦어도 내일까지는. 그는 스가와라 코우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처럼 아주 작은 동작으로 인사를 하고 둘은 흩어졌다. 스가와라 코우시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렸고 미야 아츠무는 계단을 내려갔다. 본관에 나와 맞딱드린 교정은 봄이었고 대기에 그 기운이 만연했다. 미야 아츠무는 다시 봄과 나쁘다는 단어를 떠올렸다. 스가와라 코우시는 봄과 나쁨의 어드메에도 접하지 않는 존재라고 그는 정의했다. 부드럽고 밝은데 또 부드럽고 밝지가 않았다. 흰데 빛나지가 않았다. 그 생각은 지금처럼, 침대에 누워 천장의 형광등을 바라볼 때까지 계속되었다. 길게 이어지는 생각엔 종착지가 없었다. 애초에 길을 원하고 하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미야 아츠무는 불을 끄고 눈을 감았다. 꿈에선 온통 구름과 안개로 가득찬 곳이 나와 그는 눈을 뜨고 있음에도 한 치 앞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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