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해요. 좋아했고, 좋아하고, 앞으로도 좋아할 거예요.”
이 년을 조금 넘게 입술 속에서만 묵혀왔던 고백에 대한 답은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당황이 드러나는 표정, 그것을 급하게 갈무리하는 웃음, 원했던 대답이 아닌 고맙다는 무의미한 말. 졸업식에서의 그는 고맙다는 말이 입에 붙어버린 사람 같았다. 여기에도 고마워, 저기에도 고마워. 물론 그 말의 이전엔 웃음과 축하가 있었다. 축하를 받기에 충분한 상황이었고 정이 많은 성격상 인사를 받을 사람도 많았다. 특별전형으로 도쿄에 있는 대학의 스포츠학부에 들어간 것을 모르는 사람은 교내에서 많지 않았다. 배구부 주장은 나름대로 유명인사였고 그것을 차치하고서라도 보쿠토 코타로는 존재 자체로 사람을 끄는 사람이었다. 사랑받고 자란 사람의 그 긍정을, 밝음을 시기할지언정 싫어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여하튼간에 도쿄의 고등학교에서 다른 지역으로 떠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충분히 부러움과 축하의 대상이 될만 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대상이 그였기에 조금 지나칠 정도의 축하를 받은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고맙다는 말을 들을 이유가 없었다. 나는 그에게 대학에 합격해 축하한다는 말을 하지도, 계속해서 배구를 할 수 있어 다행이라는 말을 하지도 않았다.
“사랑해요. 보쿠토 상.”
못을 박듯 다시 한번 뱉어진 말에는 아무런 답이 없었다. 소란스럽고 활기 넘치는 졸업식에서 우리 둘만이 멈춰있었다. 겨울의 냉기가 이 공간에만 미치기라도 한 듯이. 길을 찾지 못하는 눈이 느껴졌다. 햇살 같은 빛의 홍채가 방황하는 일은 여러 의미에서 가슴이 아팠다. 내가 그렇게 만들어버렸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반응하고 있다는 것. 이년여의 마음에 대한 보상이 이렇다는 것과 이미 이럴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는 것까지. 이기적이게도 답을 바랐다. 그것이 어떤 것이더라도. 어떠한 답도 듣지 못할 것이라는 건 당연하게도 생각하고 있었다. 저쪽에서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자리를 옮기려는 그를 붙잡았다. 맞닿은 손의 온도가 찼다. 내 손이 차가운 것인지 그의 손이 차가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믿지 못할 속설을 따른다면 마음이 따듯한 그의 손이 차가운 것일 테다. 잡은 손 위에 들고 있던 종이가방의 끈을 걸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며 언제나처럼 담담한 목소리를 꾸며냈다. 어제 밤이 새도록 연습했던 한 문장을 내뱉었다. 의지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녹음된 테이프를 재생하는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이 로즈마리 꽃은 기억에 좋아요.”
언젠가 읽었던 고전의 구절이었다. 가장 전하고 싶던 다음의 말은 차마 건네지 못했다. 님이여, 제발 나를 잊지 말아요. 나를, 제발, 잊지, 말아요. 축하받아 마땅한 졸업식 날에 고백을 앞세워 혼란을 준 것도 이 탓이었다. 잊지 말아요. 기억 속에 날 묻어두지 마세요. 같이 배구를 했던 후배 정도로 나를 가둬버리지 말아요. 기억해주세요. 로즈마리를, 그 비슷한 꽃을 볼 때마다 나를 떠올려줘요. 처절한 발악이었다. 언제나처럼 담담하게 꾸며낸 표정 아래로 나는 그의 코트 끝자락을 붙잡고 울고 싶다고 생각했다. 헤어짐은 너무 일렀다. 더이상 곁에 설 수 없다. 성가신 척 했던 어리광도 이젠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바래버릴 것이었다. 나를 더욱 슬프게 만드는 것은 모두가 그 사실에 굴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모두가 그의 등에 손을 흔들었다.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새롭게 펼쳐질 세상을 기대하는 눈빛은 너무나도 밝게 빛나고 있어서 나는 가지말라는 시답잖은 소리를 속에서조차 내뱉을 수가 없었다.
양 팔에 꽃다발을, 오른손엔 로즈마리가 담긴 종이가방을 들고 있는 그는 아마도 오늘 내내 그 향기에 절어있을 것이다. 그 안에 작은 화분에서 말미암은 향이 얼마나 포함되는 지는 나도 모를 일이었다. 꽃향기라는 건,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남자에겐 어울리지 않을지 몰라도 그에겐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름다운 것들에 둘러싸여 살아왔고, 또 그럴 사람이었다. 여즉 어정쩡하게 내밀어진 손바닥을 손으로 한번 쓸고 고개를 숙여 입술을 대었다. 손끝이 조금 말리는 것을 보고 입술을 뗐다. 손바닥에 하는 입맞춤의 의미를 그가 알 리 없었다. 그래, 어쩌면 차라리 알지 못하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나는 그가 이 모든 일들을 하나의 해프닝으로 여겼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그저 무뚝뚝한 후배의 장난일 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면 설명과 이해는 아주 쉬웠다. 어떤 방법으로라도 잊혀지지만 않는다면 나의 목적은 대충이라도 달성 되는 것이었다. 그를 불렀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잡았던 손을 놓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고마웠습니다. 내가 올린 공을 그렇게나 멋들어지게 내리쳐준 것, 먼저 물통을 건네준 것, 언젠가 내 꿈에 손님으로 찾아와 웃어준 것, 내 방 천장에 아릿한 이미지로나마 맺혀준 것, 내 열일곱, 열여덟의 열정이 되어준 것, 소리내며 웃어준 것, 그냥, 그 자체로 내 시선이 닿는 곳에 있었던 것, 모두 다.
입 밖으로 비져나오지 못한 말들이 뭉쳐져 눈물샘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나는 뒤돌아 그대로 걸었다. 잡는다면 잡혀줄 작정이었지만 뻗어져 닿아오는 손도,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도 없었다. 나는 울었다. 입술을 꾹 닫고 그 안으로 이를 악물었다. 흐느끼는 소리는 자존심때문이라도 흘릴 수 없었다. 고개를 들고 본 하늘은 묘한 색을 띄고 있었다. 곧 눈이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스라한 푸른색. 나의 청춘(靑春)이 저럴지도 모른다. 그는 없고, 나는 남겨져 있으니. 하늘을 마주하는 것을 그만두고 고개를 숙였다. 이제 내게 남겨진 일은 앓는 것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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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아시가 말한 고전은 햄릿입니다 :)
「이 로즈마르 꽃은 기억에 좋아요. 님이여, 제발 나를 잊지 말아요. 여기 이 팬지 꽃은 생각에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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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손바닥에 하는 키스의 의미는 간원입니다.
간원 (懇願) [명사] 간절하게 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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