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켄 전력 35차 <게임>




   가문에서 어지간히도 싸고 돌아 얼굴은 커녕 이름을 제대로 아는 사람도 드물다던 코즈메 가의 셋째이자 막내 아들이 오메가라는 사실은 쿠로오 테츠로를 놀라게 할만 한 것은 못되었다. 사실 어느정도 예상을 하고 있었다는 게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일본 증권가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뽑히는 유력가문의 막내가 사교계에 얼굴을 비치고 그 중심이 되긴 커녕 오로지 집 안에서 칩거생활. 사교성이 떨어진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설명하기엔 영 시원찮은 부분이었다. 유독 인물들이 좋기로 유명한 코즈메 가 사람이니 얼굴이 못생긴 것은 아닐테고. 이런 가문의 자제들이 사교활동을 통해 얻는 이득은 무시할만 한 것이 못되었다. 자식들의 사교활동을 꺼리는 집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 지금은 결혼해버린 첫째 아들과 둘째 딸이 약 오년 전까지만 해도 그 바닥을 쥐고 주무르지 않았던가. 이러한 모든 이익과 전적을 제쳐두고서라도 셋째를 내보이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첫째, 너무 귀한 늦둥이에 막내라 남들 보여주기가 싫었던가.

   둘째, 그 애지중지하는 막내가 오메가라 알파 놈팽이들이 치근덕대는 걸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못 보겠다고 집안 사람들끼리 합의를 봤던가.

   셋째, 둘 다던가.

   세번째 가설에 플러스 알파 정도일 것이라고 이미 쿠로오는 계산을 끝내놓은 뒤였다. 그런 이유에서 쿠로오는 코즈메 가의 사람이 저의 집 사람들만 초대한 파티를 열었다는 것을 듣고 대충 상황이 굴러가는 양상을 파악할 수 있었다. 사교계에 얼굴을 비춘 적 없는 이가 괜찮은 혼처를 찾는 방법은 집안끼리의 밀약 뿐이었다. 코즈메라.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지. 대대로 정부 쪽의 인사였던 쿠로오의 가문은 정계에서는 퍽 덕망을 갖춘 이미지였을지라도 그 영향이 재계까지는 미치지 못했다. 코즈메와의 결혼은 어떻게든 간에 가문에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 확실했다. 어차피 눈물 콧물 질질 짜면서 결혼을 약속한 사람도 없고, 설령 그랬다 하더라도 쿠로오 테츠로라는 남자는 눈 앞의 이득을 걷어차면서 사랑을 선택할 위인은 아니었다. 나쁠 게 없었다. 아마도 오메가에 인물 좋을테고. 성격이야 뭐, 정 안맞는다면 방을 따로 쓰거나 별거를 하면 될 일이었다. 얼굴을 맞대기도 전에 이미 결혼생활까지 상상의 나래를 펼친 자신을 깨닫고 쿠로오는 조금 웃었다. 이거 야쿠가 알면 질린다는 얼굴을 했을텐데.

   약 고조부모 때부터 살아왔던 전통가옥인 쿠로오의 집과는 달리 정사각형의 건물 세 채가 늘어선 코즈메 가의 저택은 현대적인 느낌이 물씬 풍겼다. 외국의 유명한 건축가를 데려와 지어 올렸다더니 확실히 돈을 들인 티가 난다고 쿠로오는 생각했다. 해마다 나무 검사할 일은 없어서 좋겠구만. 사용인의 안내를 받아 중앙에 위치한 가장 큰 건물로 들어가면서 쿠로오는 사람 좋아보이는, 친구인 야쿠의 말을 빌리자면 속이 시커매보이는 웃음을 내걸었다. 아마도 결혼할 사람에게 친절해보여서 나쁠 일은 없지.

   코즈메들은 현관 앞에 서 있었다. 부모님들끼리의 인사가 끝나고 쿠로오는 이미 일면식이 있던 첫째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 다음은 둘째. 마지막으로 오늘의 주인공. 얼굴을 보긴 커녕 제대로 된 이름을 들어본 사람도 드물다던 그 셋째 도련님. 이름은,

   “쿠로오 테츠로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코즈메.”

   “코즈메?”

   “……켄마.”

   “켄마 씨.”

   아주 내성적인가보네. 눈도 제대로 맞추질 못하는 거 보면. 염색을 한지가 꽤 되었는지 검은 뿌리가 자란 정수리를 보면서 쿠로오는 생각했다. 곧 식사 준비가 끝났다는 사용인의 말이 들렸고 마침 배가 고픈 참이었다고 받아치며 쿠로오는 흘낏 켄마를 쳐다보았다. 제 집임에도 이곳 저곳으로 배회하는 시선에 사람이 많은 것을 싫어한다는 것을 눈치챘다. 제게로 관심이 오는 것을 불안해하는 걸지도. 어쨌든 사교적인 성격이라고 하기엔 크게 무리가 있었다. 선천적인지 후천적인지는 몰라도 확실히 그 바닥에서 살아남을 부류같지는 않아 보였다. 콧대가 하늘을 찌르기 직전인 여왕벌들을 생각하며 쿠로오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같이 살기엔 이쪽이 더 나을 수도. 조용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결혼의 ㄱ자도 입 밖에 꺼낸 이가 없었지만 오늘의 이 식사가 1차 상견례 비슷한 것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쿠로오의 모든 생각이 그쪽으로 연결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향은 전혀 느껴지지 않지만 오메가라고 했다. 이미 뭐 결혼을 약속한 알파라도 있다고 하면 어떻게 하지. 일이 괜히 커지는 건 골치아픈데. 웬만해선 밖에 나가지 않는다던데 그런 사람 없으려나. 없으면 감사하고. 푹신한 크림색 소가죽 의자에 앉을 때까지도 쿠로오는 켄마 그 자체보다는 그와의 결혼에서 장애물이 될만 한 요소가 무엇이 있을지를 고심했다. 까만 바지에 연한 하늘색 블라우스를 맞춰 입은 메이드들이 애피타이저를 내려놓을 때까지 은포크의 끝만을 바라보고 있었던지라 쿠로오는 맞은편에서 은근하게 건네지는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다.

   식사 분위기는 좋았다. 그다지 무겁지 않은 이야기들이 오갔고 몇번은 쿠로오의 농에 테이블 전체가 웃기도 했다. 단, 켄마는 제외하고. 제 집의 주방장이 만든 것임에도 입에 맞지 않다는 듯 음식을 흩트리는 데 집중하던 켄마는 후식으로 나온 애플파이를 비워낸 것 빼고는 먹은 것이 거의 없었다. 응접실로 자리를 옮기고도 말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여서 쿠로오는 눈을 두어번 느리게 깜빡이곤 켄마 앞에 서 입을 떼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방 구경이라도 좀 시켜주실 수 있을까요.”

   쿠로오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고 켄마는 지원을 바라는 듯 제 형과 누나를 보았다. 다만 제 동생을 빼앗아갈 도둑놈처럼 쿠로오를 보던 켄마의 형과 누나는 이미 식사 때에 쿠로오의 편으로 완전히 돌아서버린 탓에 도움이 되진 못했다. 느릿하게 일어선 켄마는 2층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걸어갔고 쿠로오는 그 뒤를 따랐다. 2층 왼쪽 복도의 맨 끝 방. 방보다는 창고가 더 어울릴 자리였지만 방 주인의 성격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무리는 아닌 위치선정이라고 쿠로오는 생각했다. 방은 생각보다 넓진 않았다. 요새 텔레비전에서 한창 광고 중인 85인치 텔레비전이 침대 맞은 편 벽면에 걸려있었고 그 양 옆 책장에는 책이 빼곡했다. 아니, 저건 책이 아니라…….

   “…게임팩?”

   셔츠 위에 덧입고 있던 크림색 니트 풀오버를 벗어 침대에 던진 켄마는 어정쩡하게 선 쿠로오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텔레비전 앞 소파에 앉아 리모콘을 들었다. 텔레비전의 전원이 켜지고 게임기의 전원도 마저 켠 켄마는 다리를 가슴 쪽으로 끌어오더니 무릎에 턱을 괴고 게임을 시작했다. 캐릭터가 칼을 몇 번 휘두르니 몬스터들이 죽어나갔다. 소파 옆에 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쿠로오는 소파의 팔걸이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말을 걸었다.

   “재밌어요?”

   “……그닥. 한번 했던 거라.”

   “그럼 왜 해요?”

   “딱히 할 게 없으니까…….”

   “여기 있는 걸 다 했다고?”

   천장께까지 빽빽하게 들어찬 게임팩들을 가리키며 묻는 말에 켄마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 좋아하시나 보네. 게임.”

   “……뭐.”

   아마도 긍정의 표현인가보다 생각하며 쿠로오는 본론을 꺼냈다.

   “우리 결혼할 사이라는 건 대충 알죠?”

   켄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 생각은?”

   “뭐, 생각이랄 것 까지는…. 어차피 하게 될 거. 같이 살면 되는 거고, 정 안 맞으면 별거라도 하면 될테고…….”

   방금 전까지 저가 했던 생각을 심드렁하게 내뱉는 켄마를 보면서 쿠로오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말이 잘 맞으면 좋은 거지만 저 될대로 되라는, 세상만사 관심 없다는 태도가 이상한 모험심을 자극했다. 저 표정 말고 다른 얼굴도 보고싶다는, 예쁘장한 얼굴이 저를 보고 귀찮다 이외의 감정을 보여줬으면 하는. 알파로서의 본능보다는 이성의 냉정이 앞선다고 자신을 평가한 쿠로오였지만 어디에나 예외는 있는 것이었고 지금이 딱 그랬다.

   “게임이 좋아서 바깥에도 잘 안 나오는 거예요?”

   “게임이 좋다기 보다는… 사람 만나는 것 보다는 나으니까.”

   “어떤 종류가 좋아요. 이렇게 싸우는 거? 그, 뭐라고 하더라. 미연시? 그런 건?”

   “…싫어요. 게임에서라도 남의 비위 맞추는 거 별로.”

   이런 데서 도련님 티를 내네. 질색을 하는 표정에 쿠로오는 조금 웃었다. 쏘아보는 듯한 눈매에 급하게 웃음을 갈무리하고 팔걸이 위에서 켄마의 옆자리로 몸을 움직였다.

   “게임을 좋아한다니까 한번 해볼래요?”

   “뭘?”

   “우리 둘 사이에 작은 게임을 한 번 해보자고요. 기한은 혼담이 성사되기 전까지. 호감도 100을 먼저 채우면 이기는 게임.”

   “…이기면?”

   “파혼을 제외한 모든 소원 중 하나 들어주기. 어때요? 난 재밌을 것 같은데.”

   “호감도 100이란 건….”

   “일단 비유가 그렇다는 거지. 이런 건 차차 합의를 해보자고요. 어때요. 시작? 아니면 기권?”

   영 나태해보이는 얼굴일지라도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라는 건 게임팩의 숫자를 헤아릴 때부터 대충 예상한 바였다. 이런 성격에 기권이라는 말을 해버리며 어떻게 될지는.

   “…해요. 그거.”

   뻔한 일이었다. 쿠로오는 예의 그 속이 시커먼 웃을을 띄고 손을 내밀었다. 잘부탁해요. 코즈메 켄마 씨. 머뭇거리며 잡아온 손은 쿠로오의 생각보다도 더 작고 부드럽고 따듯했다. 악수를 한 채로 두어번 손을 흔들자 문 밖에서 사용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벌써 갈 시간인가 보네. 게임은 내가 방 문을 나가면서부터. 어때요?”

   켄마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쿠로오가 앞서 걸어 문을 열었고 켄마가 그 뒤를 따랐다. 현관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둘은 계단을 내려가 서로의 가족과 인사를 나누었다. 쿠로오가 현관문을 나설 때 쯤 갑작스러운 온기가 그의 손에 닿았다. 놀라 고개를 돌리는 쿠로오의 시선 조금 아래쪽에 켄마가 있었다. 여태까지 본 인생 다 산 듯한 표정은 온데간데 없이, 눈이 살짝 접혀 휘고 광대뼈가 예쁘게 솟아 있는 얼굴을 한 켄마가 쿠로오의 손을 잡은 채로 입을 열었다.

   “잘 가요. 쿠로.”

   금새 손을 놓고 계단을 올라가는 켄마를 보며 쿠로오는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한 채로 웃었다. 상대를 너무 얕본 것 같았다. 잡혔던 오른손을 타고 올라오는 은근한 꽃나무향이 명백한 증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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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구리게도 디스민즈워라고 지은 건 소꿉친구가 아니게 만난 쿠로오와 켄마의 연애과정은 보통은 아닌... 라잌 조용한 전쟁 같을 것 같아서. 쿠로오야 공인된 능글쟁이고 켄마도 만사 귀찮아 보이지만 그게 쉽다거나 호락호락한 사람이란 뜻은 전혀 아니기 때문에. 전력으로 짧게 쓰려고 했는데 풀다보니 재밌을 것 같아서 제목 옆에 1을 붙여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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