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쿠아카 전력 <빨강>


-전편 Pale Blue와 이어집니다.




   그를 보지 못한 후로 나는 조금 더 말 수가 적어졌고 조금 더 우울해졌으며 조금 더 표정이 없어졌다. 입시를 코앞에 둔 3학년이므로 이런 변화는 별스럽지 않게 받아들여졌다. 사실 변화를 눈치채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혹시 그가 있었다면 나의 이런 점들을 알아차렸을까 자문해봤지만 답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물려 받은 배구부의 주장 자리는 오래 가지 않았다. 입시가 코앞이니 배구를 더이상 하긴 어려울 것 같다는 말에 부원들과 감독, 코치님 모두가 아쉽다는 표정을 했지만 조금만 더라는 말을 하며 붙잡진 않았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적당히 잘하는 정도로 배구를 통해 대학을 갈 수는 없었다. 나는 공부를 잘했고 그것이 내게 더 나은 선택이라는 점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배구는 더이상 내게 큰 의미를 주지 못했다. 토스를 올려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바닥을 폭행하듯이 날카롭게 떨어지는 스파이크가 없었다. 그가 없었다.

   열심히, 라는 말 외에는 딱히 설명할 방도가 없을 정도로만 공부했다. 눈 밑의 그늘이 문신이라도 된 것마냥 붙어 있게 되고 코피를 몇번인가 쏟고 뻐근하지 않은 허리가 이상하게 느껴질 즈음이 되어서야 나는 대학 합격 통보를 받았고 그가 내게 단 한통의 문자나 전화도 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래. 껄끄러울 것이라고 생각하긴 했다. 나라도 2년을 넘게 알고 지내던 동성의 후배가 난데없이 사랑을 고백해온다면 쉽사리 전처럼 그를 대하기가 어려울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기적이게도 그와 나의 생각이 다르길 바랐다. 그를 사랑하는 이유도 마찬가지가 아니었던가. 다름이라는 것은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었다. 나는 내게 없는 것들을 사랑했다. 그래서 그를 사랑했다. 보쿠토 코타로를 선망과 존경의 눈으로만 담아내지 못했다. 그를 볼 때엔 눈에 아주 약한 붉은색의 필터가 덧씌워진 듯했다. 광기와 집착, 정열, 분노. 많은 감정들의 합을 얇게 펼쳐 덧씌운 그런. 그건 어쩌면 위험하다는 자체적 신호였는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지금에와서야 생각했다. 잊을만하면 선배들에게서 대학 합격을 축하한다는 문자가 날아왔다. 감사하다는 말 외에는 달리 할 답이 없어 스스로 느끼기에도 딱딱한 답문을 보냈다. 과거가 되어버린 이름들 중에서 그의 것은 없었다. 폴더를 닫고 창밖의 눈쌓인 교정을 바라보았다. 흰 눈 사이로 거뭇하게 보이는 바닥의 조합은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세상이 바라는 것들은 대충 달성했다고 생각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도쿄를 떠나지 않아도 되었다. 경영학과. 부모님이 만족스러워하고 그 주변 어른들이 부러워할만 한 이름이었다. 오른 손을 들어 턱을 괴고 느리게 눈을 감았다.

   1년간 변한 것은 거의 없었다. 그저, 이젠 얼굴을 완벽하게 생각해내기가 조금 어려워졌다는 것 정도. 대략적인 이미지로는 언제나 떠올릴 수 있었지만 눈 앞에서 움직일 때와는 확실히 그 생생함이 달랐다. 자연의 섭리인 것이라 생각했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누군가가 말하지 않았던가. 나 또한 그 섭리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대학 배구에는 일부러 관심을 두지 않았다. 텔레비전으로 경기라도 보는 날에는, 어떻게 반응할 지 장담할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전철을 타고 학교로 찾아갈지도 모르는 일이었고 충분히 가능했으리라 생각했다. 잡지도, 텔레비전에도 한줌의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교과서와 강의 영상에만 시선을 두었다. 그래도 문장 끝에서 어이없이 피어오르는 그리움은 지우개로도 지울 수가 없어서 나는 수학 문제를 풀다가도, 감정 한 톨 없는 비문학 지문을 보면서도 종종 눈물을 흘리곤 했다. 볼펜으로 채점을 해놓은 붉은 선 위로 눈물이 떨어지고 잉크가 퍼지는 그 일련의 사건들을 나는 멍청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는 이렇게, 지울 수도 없게 스며들어버린 것이었다.

   졸업식은 1년 전 그날을 떠올리게 했다. 하늘은 애매하게 푸르렀고 사람들은 많았다. 그 중에는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도 섞여있어 나는 급하게 눈을 굴려 내가 바라는 얼굴을 찾아내었다. 결과는 불발이었다. 코트 주머니 속 핸드폰의 메세지함처럼 그만 없었다. 오랜만에 보는 선배들의 얼굴은 제법 대학생 티가 났다. 건네주는 꽃다발과 축하를 받아내며 나는 은근히 물었다.

   “저...보쿠토 선배는.”

   코노하 선배는 별스럽지 않다는 듯 입을 떼었다. 그 대학 배구팀 일정이 얼마나 빡센지 자신들도 훈련이니 경기니 이것저것 일이 많아서 졸업한 후에 얼굴을 본 적이 손에 꼽는다고.

   “그녀석, 엄청 바쁘더라고.”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슬펐다. 그 바쁨의 범주에는 내가 없었다. 부모님에게 가봐야겠다는 말에 선배들은 시간나면 연락하라는 말을 건넸다. 술 사줄게. 빈 말이 아닌 것을 알아서 나는 모처럼 아무 생각 없이 웃을 수 있었다.

   사랑이 불시에 찾아온 손님처럼 나를 두드렸듯 그 노크의 주인은 언제나 예상하지 못한 부분에서 나를 습격했다. 고급 정식집에서 졸업을 축하하는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울때 쯤 전화 한 통을 받았다. 한번에 그치지 않는 진동이 그 증거였다. 나는 이름이 뜨지 않는 액정을 바라보다가 전화를 받았다. 근 1년동안을 귓바퀴에서 맴돌기만 하던 목소리가 고막을 넘어 닿아왔다.

   -어디야. 아카아시?

   “......보쿠토 상?”

   -어디냐니까!

   “...집인데요.”

   -다행이다. 잠깐 나올 수 있어? 지금 집 앞인데.

   “잠깐, 어디라고요?”

   -집 앞. 이사간 건 아니지?

   그에겐 이렇게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나는 전화를 끊고 의자에 걸쳐두었던 코트를 급하게 입었다. 잘 때나 입는 티셔츠와 바지 차림에 코트는 우스꽝스런 조화였지만 그런 것을 신경쓸 때가 아니었다. 계단을 내려와 조금 세다 싶을 정도로 현관문을 열어제꼈다. 케이지, 어디 가니 하는 엄마의 물음에는 대답하지 못했다. 낮은 대문 너머로 보이는 얼굴에 입이 얼어버렸다. 기억보다도 훨씬 말끔해지고 멋져진 그가 있었다. 몇번이고 달싹이던 입술을 그냥 감쳐물었다. 천천히 걸어가 대문을 열고 그의 앞에 섰다. 비슷하던 눈높이가 조금 더 높아져 있었다.

   “잘 지냈어?”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라는 말에 건네지 못할 질문들이 샘솟았다. 왜 연락 한번 하지 않았는지,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왜 그날 내 말에 어떠한 대답도 하지 않았는지, 왜 졸업식에 와주지 않았는지, 지금 이렇게 불쑥 찾아온 이유는 또 뭔지. 그 많고 많은 질문들을 가르고 튀어나온 말은 내가 생각하기에도 한심하기 그지 없는 것이었다.

   “...어쩐 일로?”

   이번엔 그가 나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무슨 중대한 말이라도 하려는지 큼큼 소리를 내며 목을 가다듬던 그는 등 뒤에 숨겼던 무언가를 내게 내밀었다. 반투명한 흰 종이에 싸인 붉은 동백 꽃다발. 이게 뭐냐는 물음은 눈빛으로 대신했다. 다행히도 그는 나의 표정을 알아챘다.

   “졸업식에서 주지 못했으니까. 훈련이 너무 빡빡해서 도저히 중간에 나올 수가 없었어. 미안해. 나는 꽃말 같은 건 잘 모르니까... 그냥 꽃집에 있던 것들 중에 이게 제일 아카아시랑 닮은 것 같아서.”

   나를, 닮았다고. 나는 동그랗고 빨간 꽃잎을 바라보다가 코를 묻고 향기를 밭았다. 겨울의 냄새가 났다. 그리고 아마도 그가 쓰는 것일 향수의 향도 함께. 나를 닮은 것 같아 사왔다는 말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알고나 이런 일을 하는 걸까. 나는 분명 일년 전 이 날, 그에게 좋아한다는 말과 사랑한다는 말을 함께 건넸다. 기억은 하고 내게 꽃을 주는 것일까. 붉은 꽃을 건네는 그의 감정이 나와 얼마만큼 닮아있는 지 가늠조차 할 수 없어서 나는 울고 싶어졌다. 그의 다정은 나를 질식시켰다. 숨쉴 수 없게, 졸린 숨이 눈가로 몰려 눈물짓게, 입으로 몰려가 앓는 소리를 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를 사랑하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 멍청하리만치 순수한 다정은 곧 나를 바보로 만들었으니까.

   내 눈치를 살피는 그에게 한발짝 더 다가가 허리께를 끌어안고 입을 떼었다.

   “이년 동안 코트에서 함께 뛴, 주장 자리를 물려준 고등학교 선배에게 이정도 포옹은 할 수 있는 거겠죠.”

   얼마 전 불을 바꿨다던 가로등이 켜졌다. 붉은 기가 심해 부모님 두 분 다 탐탁치않아 하는 기색이었지만 나만은 이 색이 마음에 들었다. 이 색 아래서라면 어떤 일이 일어나도 괜찮을 것 같다는, 말도 안되는 사색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내 마음과 비슷해 그런 생각이 드는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비슷한 것들은 서로를 알아본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은 기억이 있었다. 찬 기운이 앉은 어깨에 뺨을 슬며시 부볐다. 눈을 감았어도 붉은 빛이 느껴졌다. 그리고, 어깨를 감싸는 두 팔이 느껴졌다. 눈을 뜸과 동시에 낯설고도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았다. 빨강의 마법은, 틀린 것이 아니었다.

   “그래. 케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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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전개 허허. 1년간 고뇌하고 또 고민하던 보쿠토가 결국엔 아카아시를 사랑하겠다고 결심했다...는 그런 느낌입니다.

일부러 아카아시에게만 전화도 문자도 하지 않은 이유가 거기에 있던 거라고 우기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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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꽃의 꽃말은 누구보다 그대를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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